고소설 4 대작가 김시습과 김만중에 대해서
2. 작가론 - 김시습과 김만중
① 김시습(金時習, 1435~1493) - 심유적불(心儒迹佛) : 마음은 선비이나 부처의 길을 가다.
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이고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김시습은 생후 여덟 달만에 글을 알아보았고 3세에 시를 지을 줄 알았으며 5세에는 중용과 대학에 통달했던 신동이었다. 명재상 허조 등이 그를 많이 보러 갔으며, 세종대왕 또한 어린 김시습을 불러 시험하였다. 김시습이 5살에 ‘장차 크게 쓰겠다’는 세종의 성지를 얻고, ‘오세(五歲)’라 일컬어졌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452년 문종이 승하한 뒤, 12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한 단종은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으로 즉위한 지 불과 3년 만에 왕위를 내놓게 된다. 그 당시 과거공부를 하고 있던 김시습은 그 소식을 듣고 사흘 동안 두문불출하다가 자신의 서책을 모두 불사르고 당대 현실에 대한 절망을 드러내며 불문에 귀의한다. 승명을 설잠(雪岑)이라 했고, 여러 번 호를 바꾸어 청한자(淸寒子), 동봉(東峰), 벽산청은(碧山淸隱), 췌세옹(贅世翁), 매월당(梅月堂)이라 하였다. 김시습은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많은 글들을 지었고, 그 글들을 모아서 문집을 엮기도 하였다. 그가 관서지방을 유랑하며 지은 글들을 모은 , 관동지방을 유랑하면서 지은 글들을 모은 , 삼남지방을 주로 유랑하면서 쓴 등이 그것이다. 그가 31세였던 1465년 봄, 김시습은 경주로 내려가서 금오산에 금오산실을 짓고 칩거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를 비롯하여 많은 시편들을 지었다. 많은 작품들을 남겼던 방외인(方外人) 방외인은 조선 전기의 문학 현상으로, 김시습과 같이 체제 바깥에 있기를 지향했던 방랑 문학인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김시습은 충청남도 부여 홍산에 있는 무량사에서 5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② 김만중(金萬重, 1637~1692) - 모정국문(母情國文) : 어머니의 정과 국문을 사랑하다.
김만중의 본관은 광산,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이다. 그는 전쟁 중 유복자로 태어났는데, 그의 부친 김익겸은 강개한 사내였다. 만중의 부친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 아내와 어머니를 모시고 들어갔다가 강화도가 적의 수중에 넘어가자 김상용과 함께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폭사했다. 김만중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강한 삶은 이러한 집안 내력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김만중은 1665년(현종6)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이듬해 정언부수찬이 되고 헌납사서 등을 거쳤다. 1979년(숙종5)에 다시 등용되어 대제학대사헌에 이르렀으나, 1687년(숙종13) 경연에서 장희빈 일가를 둘러싼 일들로 인해 선천에 유배되었다. 1688년 11월, 경종의 탄생으로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몰락하자 그도 왕을 모욕했다는 죄로 남해의 절도로 다시 유배되어 그곳에서 56살의 나이로 삶을 마친다. 김만중이 유배 길에 자주 오른 것은 그의 집안이 서인의 기반 위에 있었던 것과 그의 조카딸 인경 왕후, 인현 왕후, 희빈 장 씨와의 관계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 에서도 엿보이듯이 김만중은 조카딸에 이어 국모가 된 인현 왕후를 받아들였고, 그녀와 적대관계였던 희빈 장 씨를 못마땅히 여겼다.
김만중은 시문집인 과 비평문들을 모은 , 그리고 소설 과 를 남겼다. 그는 유교와 불교, 도교에 모두 해박한 지식을 가진 트인 사고의 소유자였다. 또한 김만중은 국문, 한글에 대한 이해와 자각이 남달랐다. 그는 한시보다 우리말로 쓰인 작품의 가치를 높이 인정하였고, 우리말로 쓰인 정철의 가사 세 편, 을 우리나라의 참된 글로 꼽았다. 김만중은 소설의 허구성과 쾌락적 기능, 그리고 소설의 대중성을 적극 인식하였다. 이러한 그의 소설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 와 같은 소설들이 지어졌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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