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의 현장 매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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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현대문학의 현장 매춘 문화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909년 관기 제도가 폐지되고 기생들이 서울로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기생조합이라는 것이 생겼다. 기생들을 한군데 묶어 조합을 만들어 놓으면 연락하기 쉽고, 조합에서 모든 경우에 일어나는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모여든 기생들도 그들의 단결된 힘으로 자신의 권익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기예학습도 할 수 있게 됐으니, 서로의 이해를 모아 조합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러한 조합이 일제에 의해 1914년 일본식 명칭인 권번(券番)으로 바뀌게 되는데 검번 또는 권반이라고도 불렀다. 권번은 기생을 관리하는 업무대행사로 등록된 기생을 요청에 따라 요릿집에 보내고 화대를 수금하는 일을 맡았다. 신입기생을 채용할 때에는 인물이나 태도, 가무, 서화 등을 심사해 채용했으며, 어린 기생들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치고 요정 출입을 지휘하며 일종의 매니저 역할을 하였다.
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은 라디오의 음악방송에서 주로 출연하고, 축음기의 음반을 취입하여 대중적 인기 가수의 반열에 올라선 이들도 있었다. 초창기 영화도 기생 출신의 영화배우가 중심이었으며, 각종 전람회와 박람회에 흥을 돋우기 위한 예능의 기예도 각 권번의 기생들이었다. 당시 신문광고에 등장하는 제품광고 및 잡지, 행사 포스터의 표지 사진 등에도 기생들이 많았다. 이를 보면 당시 권번 기생들을 현재의 연예인처럼 방송, 음악, 영화, CF, 행사 도우미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정권번의 모습
② 공창제의 성립
나폴레옹 시대에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된 근대 공창제는 군대 위안과 성병 관리를 기축으로 한 국가 관리 성매매 체계이며, 근대 국가 건설, 특히 강력한 군대 건설의 이익과 결합해 탄생한 제도다. 이 제도는 성기를 검진해서 무래함이 증명된 여성을 창부로 등록시키는데, 남성, 특히 장병을 성병에서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공창제는 19세기 중반에는 유럽 제국에 파급되어 1860년대에는 의 형태로 영국에 도입된다. 공창제는 선진 자본주의 제국의 식민지 확대 과정에서 식민지에 도입되어, 우수한 제국주의의 이익을 유지하는 성격을 강화시켰다. 메이지시기에 확립된 일본의 근대 공창제는 개국에 의해 세계 자본주의에 포섭된 일본이 근대국가 수립 과정에서 유럽 공창제를 모델 삼아 재편성한 것이다. 일본 공창제는 메이지 신정권 아래서 근대적으로 재편되어 인민 수탈 체계로 기능하면서 일본 하층계급 여성뿐 아니라 식민지 여성도 그 저변에 편입시킨다. 유곽은 그 지역에 거금을 투자해서 장사꾼들을 살찌우고, 국가와 지방 관청은 성매매 여성에서 직간접적으로 세금을 징수해 엄청난 재정수입을 올렸고, 군대는 성매매를 통해 성병에 걸릴 염려 없이 위안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공창제는 근대국가 건설과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전개에 기여했다. p.393 후지메 유키 지음 2004 삼인.
③ 일제강점기 시대의 공창제 (1910 ~ 1940년대 )
여성이 금품을 받고 성을 제공한 역사는 남성우위 시대 또는 부계 사회와 더불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조선조 이전에 매춘 행위가 전혀 없었다고 단언할 근거는 없다. 다만 밀매음 형태를 띠고 사회의 여러 구석에서 행해졌다. 조선조 말기에 이르러 한국사회에는 기생 이외에도 이른바 갈보(蝎甫)라고 불려진 유녀 (遊女)들이 점차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 집단들이 새로 등장했다 하더라도 매음행위였을 뿐 매춘행위를 조정에서 공인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을사조약 체결 이후 조선인 매음부에 대한 성병검사를 실시하고, 기생, 창기 단속령을 발표하며 조선에서의 공창화 정책을 실시해 나갔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제국군대의 성병만연방지정책이라는 배경과 함께 일본의 조선에서의 지배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문화적 우월성과 지배권 강화를 위한 장치로서의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p.65~66 박종성 지음 1994 인간사랑.
일제 시대의 매춘업은 원칙적으로 유곽, 즉 공창이었다. 공창이라 함은 외부와 격리된 지역에 매춘업자를 집중시켜 그것을 유곽이라 하고 그곳에서만 성을 팔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이른바 집단 격리제였던 것이다. 유곽에서는 경찰의 엄중한 감독하게 공정한 가격에 의하여 성이 매매되었고 그에 상응한 세금도 부과되었다. 일제 시대 서울에는 중구 관내에 두 개, 용산구 관내에 두 개의 유곽이 있었다. 두 개씩 있었던 것은 일본인과 한국인 전용이 따로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p. 40 손정목 지음 1996 일지사.
조선 내에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세금도 내지 않는 사적 매춘업, 즉 사창이 생긴 것은 1920년대 중반기부터였다.
△ 우리나라에 조직적인 성매매를 가져온 것은 일본인들이었다. 본정(지금의 충무로 일대) 부근에 신정 유곽이 있어 사람들을 불러모았다.(사진/ )
열한 시쯤 해서 하는 아내의 첫 번 세수는 좀 간단하다. 그러나 저녁 일곱 시쯤 해서 하는 두 번째 세수는 손이 많이 간다. 아내는 낮에 보다도 밤에 더 좋고 깨끗한 옷을 입는다. 그리고 낮에도 외출하고 밤에도 외출하였다.… 외출할 뿐만 아니라 내객이 많다. 아내에게 내객이 많은 날은 나는 온종일 내 방에서 이불을 쓰고 누워 있어야만 된다.
이상의 소설 의 작품 배경이 된 "33번지의 18가구"라는 것은 분명히 사창의 집단가옥이고, 주인공의 아내는 사창이었다. 그녀는 술집 작부도 카페 여급도 아닌 보통의 여인이었지만, 밤이 되면 진한 화장을 하고 외출하여 카페 같은 곳에서 있다가 남자를 낚아 오는 사창이었던 것이다.
1920년경부터 사창이 생겨나고 있기는 하였으나 일제시대 매춘업의 주종은 공창이었고, 공식 발표보다 훨씬 많은 수의 창기가 유곽에서 매춘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주된 원인은 가난이었고, 빈곤의 극에 달한 부모가 딸아이를 유곽에 팔아넘긴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한번 매춘업계에 들어서면 그 생활은 실로 처참한 것이었다. 영업주(포주)의 학대와 착취, 유객들의 횡포, 알코올중독, 성병 등에 시달리다가 폐결핵 등 각종 질병을 얻어 결국 30세를 겨우 넘긴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920년대 전반기를 거치면서 조선에도 점차 매춘업이 일반화 현상으로 되어간다. 사창의 만연이었으며 그것은 동시에 공창의 상대적인 쇠퇴였다. 사창이 일반화되었다는 것은 원래 술자리에 앉아 노래나 춤 등 기예를 파는 것이 주업이었던 기생, 그리고 술자리에서 술을 따르고 대화의 상대가 되던 이른바 작부가 손님의 요구가 있으면(경우에 따라서는 더 적극적으로)돈을 받고 성을 제공하게 되었고 그것이 일반화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사창이 만연한 것은 과연 무슨 이유에서였던가. 첫째, 일제 의한 토지조사사업과 토지겸병정책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후의 만성적 불경기 등이 겹쳐 생활고가 극에 달하자 유랑, 걸식, 아사 보다는 매춘을 택하는 여성층이 많이 나타났다. 둘째, 매춘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가치관이 허물어지게 되었다. 셋째, 공창이 지닌 감옥의 굴레가 싫었을 것이다. 넷째, 창기, 기생들 모두가 일정액의 세금을 내고 있었지만, 매춘은 어디까지나 표면상 비밀행위 즉 밀매음이었기 때문에 그 부분만은 탈세가 가능하였기 때문에 사창이 일반화 되어 가고 있었다. "일제하의 매춘업 -공창과 사창." (1988) 손정목 p.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