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거대 소수민족 위구르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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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의 거대 소수민족 위구르족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위구르족(維吾爾族)과 한족(漢族) 등 13개 주요 민족을 포함, 전체 47개 민족으로 세분되는 다민족이 더불어 살아가는 중국 서북의 신장은 다양한 문화와 종교로 구성된 잡채를 연상케 한다. 단일문화권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나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겸손함과 지혜, 그리고 지배가 아닌 성경적인 섬김의 자세가 요구되는 지역이다. 전통적으로 민족 간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지역으로서 특히 주체 민족인 한족과 원주민을 자처하는 위구르인들 간의 갈등이 첨예하다. 이로 인해서 근현대 역사 가운데 크고 작은 유혈 충돌이 일어났고 지금도 올림픽을 계기로 정치와 종교적 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있다. 동서의 시대별 최첨단 문화의 교류지역으로서 문화적 번성을 이루었던 신장은 역대 왕성했던 세계 종교들이 모두 거쳐 간 지역이다.
배화교(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의 영향으로 일찌감치 선과 악이 대립된 이원론적 세계관이 정착 됐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인도 다음의 불교 성지로 간주될 정도로 고대 신장(서역)은 불교가 왕성한 지역이었다. 위구르 농민들은 자신들이 태초부터 무슬림인 것처럼 주장하지만 실제로 신장 곳곳에는 여전히 수많은(550여 개) 불교 유적들이 남아있어 일본 인류학자들을 오래전부터 유혹해 오고 있다. 신장의 불교는 서기 전 80년 경 인도 캐시미르로부터 남신장(南新疆) 허티엔(和田)을 통해 소승불교가 들어왔다. 서기 2세기경에는 대승불교가 실크로드를 통해 신장 각지에 퍼지게 되었으며 서기 3세기 후기가 되었을 때는 전 신장에 불교가 유행될 정도로 번성하였다. 4~5세기 위티엔(지금의 허티엔 일대)과 쿠차(庫車) 지역에 불교가 왕성하여 서역의 불교 중심지로서 쌍벽을 이루었다. 당나라 시대에는 고창(지금의 투루판 일대), 위티엔, 쿠차 지역이 3대 불교 중심지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0세기 중엽 이슬람 전파로 사회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불교는 점차 서역에서 쇠퇴하었다.
위구르족의 민족사 개략
동돌궐족(지금의 몽골지역, 신장은 당시 서돌궐족 지역)이 쇠퇴하자 744년 오르혼강(몽골 북부를 흐르는 강, 전체길이 1,124㎞) 기슭에 도읍을 정하고 위구르제국을 건설하였다. 약 100년이 지난 840년 동투르크스탄에서 진출한 키르키즈와 약 40년간의 전쟁 끝에 멸망당했다. 키르키즈에 의해 멸망하기 전까지 위구르인의 조상인 회골인들은 돌궐문자에 마니교를 국교로 삼았다. 제국이 붕괴된 뒤 위구르인은 남하하여 세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지금의 깐수(甘肅) 신장 북부의 투루판(吐魯番) 남부 카스(喀什)지역이다. 각 지역에서 개별적으로 왕국을 건설하였다. 신장 지역의 두 왕국은 13세기 초, 1209년 몽골의 징기스칸에 의해 점령되었다. 840년 위구르제국이 멸망한 후 당나라와의 교류를 통해서 위구르인들은 내지의 중국 문화의 영향을 더 적극적으로 받게 되고 북방 유목 민족으로는 처음으로 정착 도시를 건설하였다. 생업은 목축업에서 점차 농업으로 전환되어갔다. 이 과도기는 현대 위구르인들의 사상 체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전환기였을 것이다. 서역으로 이동한 위구르인은 소그드 문자를 기초로 하는 위구르 문자를 사용하였다.
위구르족의 한민족과의 교류
중국의 원나라 시대 한국의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고려가 몽골의 간섭을 받으면서 몽골 관리들이 당시 행정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중앙아시아계의 무슬림들을 대거 수행하도록 하였다. 고려사에서 등장하는 회회(回回)인은 주로 투르크계 위구르인들을 의미하는데 당시 몽골이 고대 위구르 문자를 공식어로 채택하고 재정과 교역 행정 업무의 대부분을 위구르인이 관장하도록 했다.
한국의 오늘날 덕수장씨의 시조로 알려진 회회인 삼가(三哥)는 1274년 고려 충열왕비가 된 원나라 공주의 시종관으로 고려에 와서 높은 관직에까지 올랐던 사람으로 충열왕으로부터 장순룡(張舜龍)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고 고려 여인과 결혼해서 한민족에 동화된 무슬림이었다. 당시 고려에 왔던 위구르인들 가운데는 원나라의 통역관으로 활동한 사람들도 많았는데 지금의 개성에 타운을 이루고 사원도 건립하여 살았다고 한다. 조선 초에는 사역원(司譯院)의 외국어 시험 과목에 위구르어 연수 과정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글 학자 3인 중에 위구르어가 능통한 학자도 있었다. 최근 신장의 위구르족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한국 드라마를 열정적으로 시청한다. 드라마를 통해서 그들이 이해하는 한국인은 경제적으로 발달했으면서도 대인 관계에 질서가 있고 서로 존중하며 특별히 전통문화가 현대문명과 조화를 이룬다는 면에서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오랫동안 이슬람에 젖어 살아온 듯한 그들이 드라마를 통해서 공감하는 한민족과 그들의 투르크 민족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의 교차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위구르인들은 정체성의 과도기에 있다고 할 수 있고, 개인별 정체성의 차이를 분류하자면 전통적인 투르크 민족적 정체성, 이슬람 근본주의적 정체성, 한족화된 정체성 등으로 나누어진다. 그러한 그들이 마치 향수병에 걸린 듯 한국 드라마를 통해 그들 속에서 흐려진 고대 전통문화의 뿌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민족(韓民族)과 신장 위구르족의 교류 역사를 볼 때 서로 멀고도 가까운 민족이라 할 수 있다.
위구르족 이슬람화 촉진의 시대적 요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