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에서 공동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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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가에서 공동체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남한의 근대화과정은 지난 여러 해 동안 특별한 주목을 받아왔다. 1950년대 초기의 한국전쟁에 의한 전면적 파괴 이후, 남한의 기적적인 경제적 업적은 제3세계의 근대화에 하나의 모델로 생각되어왔다. 그러나 오늘날 남한에서 우리는 아직도 식민통치 기간에 지배와 착취의 주된 수단으로 쓰였던 여러 억압적 제도들과 관행들 및 가치들을 볼 수 있다. 국가와 자본이 함께 이런 것들을 유지시키고 강화시켜온 것이다. 외면적인 경제적 성공의 뒤에는 미국과 일본에 대한 무거운 의존, 외채위기, 부실화된 기업들, 부(富)의 중앙 집중, 황폐화된 농업 및 생태적 위기와 같은 많은 구조적 문제들이 있다. 소득의 분배가 상대적으로 공평하다고는 하지만, 독립 이래 사회집단의 격차가 커진 정도는 놀랄 만한 것이다. 토지에 대한 공유권이 사유(私有)로 바뀜에 따라 공동체가 공유하는 토지는 없어졌으며, 농촌의 공동체들은 근대화를 위한 국가의 계획된 경제에 의해 체계적으로 무너져 왔다. 남한의 근대화는 단지 서구적 틀속에서만 성공적인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근대화의 과정은 동시에 국가형성(state-formation)의 과정-단순히 근대적인 기술과 그 물질적인 산물의 도입에 그치지 않는-이었지만, 또한 사회구조와 사람들이 자연과의 관계 및 사람들 상호간의 관계에서 서로 작용하는 기본적 태도에 하나의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이었다.
두레의 파괴
1910년에 일본이 한국을 정식으로 합병하면서, 일본의 산업자본은 한국경제에 대한 지배를 확대하였다. 1912년부터 1919년까지 실시된 토지 조사사업이 이 과정의 첫 단계였다. 식민지 정부에 의하면, 이 사업의 목적은 토지세제(土地稅制)를 확립하고, 사유토지를 보호하며, 농업의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기에 두 가지 숨겨진 목적이 있었다. 첫째로, 그것은 한국을 일본에 대한 쌀의 공급자로 전환시킴으로써 일본에서 저미가 저임금 정책을 견지하려는 것이었다. 둘째로, 그것은 한국의 농민들을 토지로부터 몰아냄으로써 성장하는 일본인 주도의 제조업을 위해 값싼 노동을 창출하려는 것이었다. 식민지의 농업정책들은 한국의 농부들을 가난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시골의 공동체구조에 파괴적 효과를 미쳤다. 한 가지 중요한 예는 전통적으로 내려온 공동의 작업조직인 두레의 파괴이다. 두레에 관하여는 조금 상세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근대국가에 바탕을 둔 사회구조에 대한 대안(代案)이 되는 하나의 구체적인 모델을 우리에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두레에 관한 역사적 기록은 서기 200년경의 삼한(三韓)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레의 초기형태에 있어서는 마을의 모든 성인 구성원들이 사냥, 어획, 농사 및 건설에 참가하였다. 식민지시대가 시작될 때까지, 두레의 구성원은 16세와 55세 사이의 성인 남자들에 한정되었으며, 공동으로 하는 작업은 농업생산에 초점을 두었다. 작업에의 참여를 거부하는 성인 남자는 따돌림을 당하거나 마을에서 쫓겨나기까지 하였다.
한해는 6월부터 7월에 걸친 일하는 계절과 나머지 기간의 준비하는 계절로 나뉘었다. 모심기와 김매기가 일하는 계절 동안의 두 가지 주된 활동이었다. 일하는 계절이 오면 구성원들은 함께 모여 그들의 작업을 계획하고 조직하였다. 두레에는 그 자체의 규약이 있었으며, 각 구성원은 그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였다. 작업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마을에 있는 모든 토지를 포괄하였다. 첫째가 공유지, 둘째가 노동력이 없는 토지(미망인과 장애자가 소유하는 토지), 셋째가 구성원들 자신이 소유하는 토지, 그리고 끝으로 대지주들이 소유하는 토지의 순서였다. 대지주들은 통상 두레의 도움으로 이익을 얻었으며, 자발적으로 그 이익에 상응하는 대가를 쌀 또는 돈으로 마을에 기증하였다. 일할 능력이 있는 모든 구성원은 공동체에 기여하지 않으면 안되고, 공동체는 기여할 능력이 없는 모든 가족을 도왔다. 아무도 제외되지 않았으며, 어떤 개인도 공동체에 대해 독단을 할 수가 없었다.
몇 가지 관행들이 두레의 특징을 이루었다. 하나는, 일에는 항상 노래와 춤이 수반되었던 점이다. 장구와 피리를 갖춘 선도집단(先導集團)이 리듬을 만들어내면, 사람들은 거기에 맞추어 일을 하면서 함께 노래를 불렀다. 1884년 한국을 여행했던 칼스(W.R. Carles)는 전한다.
"약 100명 가량이 일을 하고 있었다.… 한국 사람들은 항상 집단으로 일하기를 즐기는 것 같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래를 하고 있었다."
일에는 항상 공동의 식사와 휴식이 따랐다. 전형적으로, 공동의 작업은 해가 뜰 때 시작하였으며, 몇 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일한 뒤에는 간단한 식사가 쌀술과 함께 제공된다.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가족들은 교대로 부엌일을 했다. 정오가 되면 잘 차린 점심이 제공되고, 한 시간이나 걸리는 노래와 춤이 뒤따랐다. 그리고는 한 시간 동안 낮잠을 잔 뒤, 해가 질 때까지 집중적으로 일을 했다. 모두 12시간이나 되는 하루의 작업시간 동안 실제로 일하는 시간은 8시간뿐이며, 나머지 4시간은 공동의 식사, 휴식 및 춤에 충당되었다.
식민통치와 더불어 두레는 서서히 없어져갔다. 예를 들면, 1915년에 중부 한국에 있는 홍성군(洪城郡)의 139개 마을에는 197개의 두레 공동체가 존재하였으며, 그 중의 83.2%는 자체의 음악연주단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모든 모심기 작업이 두레에 의해 행해졌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런데 1945년 말에 이르기까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이들 중의 거의 모두가 없어져버렸다. 시장경제가 농촌지역에까지 침투함에 따라 협동정신이 없어져갔다. 생산은 점점 공동체의 필요로부터 개인적 이윤에로 이끌려갔다. 정치권력이 중앙에 집중되고 경찰력과 관료제가 확산됨에 따라, 공동체의 자율은 그 기반을 잃게 되었다. 두레를 위해 중요한 자산이었던 공동체의 토지는 토지조사사업이 시행됨에 따라 없어져갔다. 임금을 받는 농업 노동자와 소작농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주로 자작농이었던 두레의 참가자는 그 수가 줄어갔다. 형편을 더 악화시킨 것은 많은 젊은이들이 임금노동자가 되기 위해 도시지역으로 이주한 것이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남에 따라 일부의 사람들은 징집을 피해 외국으로 이주하기도 하는 한편 많은 사람들이 징집을 당했다. 식민지 정부는 능률을 이유로 쌀술의 생산과 농악의 연주조차도 금지하였는데, 이런 것들은 두레에는 없어서는 안될 부분들이었다.
식민지의 근대화
강요된 근대화는 농업의 파괴를 가져왔다. 1930년대에는 공업제품이 대일 수출의 36.3%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산업부문별 구성비는 또한 같은 추세를 나타낸다. 1920년에만 해도 농업부문은 총생산액의 80% 이상을 생산했던 것이, 1940년에는 공업부문이 농업부문보다도 더 큰 몫의 생산을 하게 되었다. 1910년부터 1919년까지 공장 수는 13배, 자본금은 16배, 종업원 수는 6배, 총생산액은 24배로 각기 증가하였다. 1921년부터 1930년까지의 사이에 자본은 1.4배 늘어남에 그쳤으나 공장 수는 4배로 늘었다. 1930년대에 일본은 한국에서 중공업과 군사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그 초기에는 발전산업(發電産業)을 시작하였으며, 그 끝에 가서는 전기화학공업에 착수했다. 1938년에 제조업체의 수는 2,278개에 이르렀는데, 이는 1923년에 있었던 수보다 10배 이상으로 더 늘어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