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발견은 학문적 활동에 있어서 가장 우선 시 되는 덕목이다. 학자들은 어떠한 활동을 함으로써 나타나게 될 사회적 결과에 대한 일체의 가정이나 고려를 하지 않은 채, 토론과 여러 증거들을 따라야 한다고 배운다. 그 결과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다거나 관습적이거나 권위있는 견해와 배치된다 하여도 한 인간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여 최상의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 바로 학자의 목표이다. 특히 철학 안에서는 그 어떠한 것도 질문이나 비판들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다; 모든 가정과 가설들이 모두에게 열려 있고 이러한 가정들은 비판적인 시각들을 견뎌내야만 한다. 이제 철학자들이 자발적이고 자유 의사에 의한 탐구에서 항상 성공을 거둔다거나, 그들의 탐구가 자유로웠는지, 또는 그들이 진실의 목표에 항상 도달한다거나 하는 이러한 주장을 전개하는 것을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종종 특정한 가정의 미심쩍은 부분을 알아차리지 못할 경우도 있고, 이에 따라 이러한 가정과 가설들이 감수해야 할 비판들로부터 그것들을 지켜내지 못할 때도 있다. 자연 과학이나 사회 과학 분야에 종사하는 우리의 동료들처럼, 우리도 특정한 시각이나 일반적인 이론에 묶여서 그러한 가정들이 마주치게 되는 여러 난관들을 알아차리지 못하기도 한다. 언제든지 우리가 발휘하는 최상의 노력, 그 노력을 뛰어 넘는 난관들은 쉽게 존재할 수 있다.
철학자들이 정책 결정 과정에 좀 더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더 이상 학구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은 채 단지 정책 결정자들이 학문적 잡지의 기사들을 읽어보기를 희망한다면, 진실을 탐구하기 위한 자유스러운 과정의 학문적인 도덕(즉 모든 가정들이 의문에 대해 개방되어 있으며 그들이 이끄는 토론에 따르고 참여하는)은 다양하게 관련지어져 있는 정치적 압력의 영향을 받게 된다. 현재 부각되고 있는 것은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종종 대면하게 되는 “dirty hands”의 정치적 문제들이다. 나는 내가 그 문제를 하나의 순수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철학자들이 정치가의 부패한 세력에 의해 더렵혀지는 그러한 현상으로 치부하지 않고 있음을 강조한다. 오히려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요점은 학문적인 연구와 공공 정책들의 각기 다른 목표들이 차례로 그 정책과 연구의 집행자들에서 서로 다른 행동과 덕목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공공 정책 결정 과정에 있어서 자신의 학문적 방법을 고집하는 철학자들은 더러운 정치적 타협과 부정부패가 난무하는 현실 속에서 청렴결백한 사람으로 존경받지 못한다. 대신 만약 그들이 그러한 학문적 덕목을 계속 유지한다면 그들은 종종 학계에서 영향력을 끼치기 힘든 자신들의 모습뿐만 아니라, 그들의 책무와 행동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왜 이러한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가?
갈등에 관한 중요한 점은 공공 정책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의 첫 번째 염려가 (당연한 이치이겠지만) 공공 정책에 대한 그들의 활동이 가져올 결과들과 그러한 정책으로부터 영향 받는 사람들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공공 정책에 의한 결과들에 대해 도덕적 평가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러한 도덕적 평가를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들은 공공 정책, 더 나아가 인간과 그들의 행동에 따른 결과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도덕적으로 결정론자가 되고 말 것이다. 물론 몇 가지 형태의 결정 우의적 입장은 도덕적 이론에 잘 부합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그러나 공공 정책의 제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만약 그들의 행동이 정책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더불어 그러한 정책들이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지, 이러한 점에 대해 그들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그들은 아마도 무책임한 사람으로 평가될 것이다.
진실의 규명을 위한 자유로운 탐구열로 구성되어 있는 학문적인 연구의 덕목은, 그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각기 다른 학문적 연구의 결과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 미칠 학문적인 노력의 영향력이 좀 더 간접적이고 타 기관이나 협회에 의해 조정되며 더 나아가 이러한 영향력이 공공 정책 결정의 한 부분까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영향을 줄 것이다. 이것은 학문의 사회적 결과에 대해 너무 많이 염려하지 않고 그것을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인간의 삶 중의 일부인 학구적인 연구에 직접적이고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철학자들이 정책 분야로 자신들의 위치를 옮겨갈 때, 그들은 그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생각, 사상, 또는 공약들도 지식과 앎으로부터 그들이 한 일에 대한 정책의 결과로 옮겨가야 한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아직 이렇게 할 준비가 안되어 있다면 왜 그들은 정책 분야로 이동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들이 그곳에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학문적 목표와 정책적 목표간의 이러한 갈등의 여러 특수한 사례들을 더 들어보고, 이러한 도덕적인 문제들은 나만의 경험도 포함한다는 것을 밝혀둔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떠한 철학자들도 그들이 좋다고 판단한 정책을 마음대로 제정할 수 있는 왕이나 여왕 같은 전지전능한 사람은 없었다. 그 대신 내가 겪은 경험담이 좀 더 전형적이고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대통령 산하 위원회의 전문적인 스태프인데도 철학자가 아니었던 사람들과 함께 일을 했었고, 그 스태프들은 대통령 내각의 외부에서 정치적으로 임명된 사람들로써 그러한 위원회에서 일을 했다. 우리는 생윤리학 분야의 서로 다른 이슈에 대해 책 10권 분량의 보고서를 만들었고, 각각의 이슈들은 몇몇 스태프들에게 할당되었다. 그 위원회의 위원들은 우리가 보고서에서 말할 내용에 대한 마지막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말해야만 하는 것에 대한 나만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약 내가 특정한 프로젝트에서 일하는 다른 스태프들을 설득할 수 있었고 그 위원들까지도 설득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나의 견해는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었다. 나와 나를 잘 따라주었던 다른 2명의 보조 철학자들에게는 정확한 해답,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도덕적 권위자의 역할은 허락되지 않았다. 우리의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행동은 대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 아래 묻혀져 버렸다.
그 스태프들은 우리가 일하고 있던 다양한 문제들에 관해서는 우리의 보스, 즉 위원들보다 더 전문가적인 모습도 가지고 있었다. 우리의 경우에는, 정책 또는 정치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런 현상은 매우 넓은 범위 내에서 당연하고 필연적이게 나타났다. 그 이유는 스태프들은 위원회의 책무 범위 안에서 자신들의 전문적 지식을 발휘하기 위해 선발되었고 거의 모든 시간을 우리의 프로젝트를 위해 일했지만 위원들은 그들의 전문적인 활동을 계속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시간의 일부분만 위원회 활동에 투자했기 때문이다. 스태프들은 가끔 전문 위원들이 자신들만의 분야에서 특정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만약 우리가 보고서에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들이 꼭 해야만 하는 말들을 넣으려면 우리는 그 위원들의 견해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여야만 했다. 이것은 토론과 대화의 결과적인 배경에서 보았을 때, 나와 다른 스태프들은 우리가 어떠한 논쟁이나 직책의 의미를 고려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이러한 생각들 대신, 어떤 결과가 다른 이들에게 특정한 토론을 하게 하거나 특정한 지위를 차지하게 하는가에 대해 더 관심을 갖고 있는 우리 자신들을 종종 발견하였다. 그 목표는 종종 진실을 찾기 위한 평범한 탐구 대신 이상적인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 다른 이들을 설득하거나 조종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다음에서 한가지 사례를 살펴보기로 하자.
생명을 지속시키는 치료에 대한 결정에 관한 우리의 보고서에서, 우리는 간략하게 살인하는 것과 죽음을 허용하는 것, 의사들과 환자들 사이에 죽음에 관한 견해 차이 등, 이러한 결정을 내리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몇몇 특징적인 것들에 대해 언급했다. 나는 일반적으로 살인하는 것과 죽음을 허용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있으리라 믿고, 그 둘 사이의 다른 점을 이것 자체의 도덕적인 중요성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며, 비록 살인이 정당화된다 해도 생명을 유지시키는 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살인이라는 것을 밝혔다. 말할 필요도 없이, 대부분의 위원들은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살인은 죽음을 허락하는 일보다 더 나쁜 일이고 생명 유지 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그의 죽음이나 살인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병 때문에 죽게 되는 환자에게 허용되고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생명 유지 치료의 중단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 환자가 이러한 요구를 했을 때는 그것이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는 데에는 공감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이러한 결론을 내린 것은 매우 혼란스럽고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 진 것이라고 보고, 나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그들을 자각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내 철학적인 이성은 그러한 혼란을 진정시키고 그에 따른 논쟁에 참여하도록 나를 부추겼다.
그러나 죽음을 허용하는 것이 기본적으로는 살인과 비교했을 때 전혀 도덕적으로 차이점이 없고 생명 유지 치료를 중지시키는 것 또한 살인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확신시켰을 때 이에 따른 결과는 무엇인가? 꽤 그럴싸한 사례를 들면 생명 유지 치료 중단의 도덕적 허용을 인정하는 그들의 입장을 반박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자신이 한 행동의 결과가 그들을 보증할 수 없는 나쁜 상황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때, 누가 자신의 견해를 확고히 하여 혼란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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