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이해 청나라의 정치 문화 사법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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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의 이해 청나라의 정치 문화 사법4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지배한 만주족의 왕조(1616~1912). 한족이 아닌 이민족으로서 중 위안[中原]을 통일하여 통치한 2번째 국가이며, 중국 역사상 최후 왕조이다.
정치제도
중앙에 최고 정무기관인 내각 대학사, 그 집행기관인 6부 5시(寺) 및 감찰기관인 도찰원(都察院)을 두어 각각 황제 직속으로 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중가르부 토벌 때에 용병의 신속과 군사기밀 보장을 위해 내각의 실권자를 선발, 군기처가 신설되자 실권은 그 곳으로 넘겨졌으며, 건륭 초기에는 독립된 기관으로서 군사 국무의 최고 권한을 겸유하기에 이르렀다. 또 이번원이 신설되어, 몽골 신장 시짱 등 소위 번부의 일을 관장하였다.
서양 제국과의 교섭도 당초에는 그 밑에서 조공국과 같은 대우로 전락했으나, 말엽에 이르자 업무의 확대와 제국의 압력에 따라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이 설치되었고, 곧 이어 1901년에는 외무부로 승격하였다. 말기 몇 년 동안에는 이 밖의 관제개혁도 시행되었으나, 만인 중심의 집권주의는 한인 관료의 이반을 초래하여, 오히려 붕괴를 재촉하기만 하였다.
지방 관제에서는, 최고 행정구획인 성 밑에 부가 있고, 부는 다시 주(州) 현(縣) 청(廳)으로 나누졌다. 성에는 포정사 안찰사가 있어 민정 감찰을 분담하였으며, 전대에 임시 관직으로 나타났던 총독 순무(巡撫)를 최고의 지방관으로서 두었는데, 총독을 1, 2개 성에 1명, 순무를 거의 1개 성에 1명씩 둔 것은 청왕조의 특색이었다.
성에는 또한 제독(提督) 총원(總員) 학정사(學政使) 도원(道員) 등이 있어서 각각 군사 교육 성 내의 업무를 분담 처리하였다. 부 주 현에는 지부(知府) 지주(知州) 지현(知縣)이 있었으며, 이들 밑에 백성은 주로 보갑제(保甲制)로 조직되어 있었다.
백성으로부터 수탈을 일삼던 정부는 커다란 역사적 변화로서 재래의 인두세(人頭稅)와 같은 계보의 정은을 폐지하고, 토지의 단일체계, 즉 지 정은제(地丁銀制)가 옹정 초년을 계기로 거의 전국적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왕조가 전통적인 일군만민(一君萬民) 체제를 사실상 폐기하고, 기초과정에 있어서의 지주제(地主制)의 진전을 용인한, 그 위에 기초를 둔 것을 의미한다.
지 정은이 국가 세입 전체에 차지하는 비중은 건륭 연간에는 거의 70 %에 달하였으나, 이에 버금가는 주요 세목인 염과(鹽課:제염업자와 그 상인에 대한 과세) 관세(關稅:통과세)의 2가지가 점차로 증가하였는데, 특히 청 말에는 관세가 현저히 늘어났다. 태평천국의 난 진압의 군비로 신설되어, 양무운동(洋務運動)의 재원으로도 쓰던 이금(釐金)도 이 일종이다. 이와 같은 국가재정의 수탈을 가능케 하는 경제외강제(經濟外强制)의 기초를 이루고 이민족 지배를 지탱케 한 것은 청왕조 특유의 병제인 8기(八旗)였다. 즉 만주인을 모두 병사로서 홍(紅) 백(白) 황(黃) 남(藍) 및 그것에 테두리가 달린 8가지 기색(旗色)으로 나눈 세습적인 단체로 편성하였다. 뒤에는 만주인뿐만 아니라 몽골 한군(漢軍)의 8기까지 더하여 합계 24기(旗)로, 기적(旗籍) 20만에 이르렀으나, 그래도 광대한 영토를 경략(經略) 수비하기에 부족하였으므로, 한인만으로 편성된 녹영(綠營:綠旗)을 설치하고 총독과 순무에 의해 통솔되었다. 팔기의 구성원, 즉 기인(旗人)에게는 기지(旗地)가 지급되어 경제적 자급이 배려되었다. 그러나 경작자로는 한인이 진출, 빈궁해진 기인(旗人)은 기지를 전당잡히거나 팔아넘기는 일이 많아짐으로써 8기제도는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그 무력함은 백련교의 난에서 백일하에 드러났다. 이 때 민간의용군인 향용(鄕勇)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태평천국의 난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그 후 청왕조도 뒤늦게나마 연군(練軍:8기와 녹영에서 선발)과 서양식으로 편성한 신군(新軍)을 양성하였으나, 연군과 신군사이에서 혁명파의 반란이 일어나 신해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사법제도
청의 법은 유럽의 법과 기본적으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법의 판결에 대한 청원은 국제적 긴장을 경감시키기보다는 약화시키리라는 것이었다.
비록 광범위하게 선대의 경험과 관례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고는 하더라도 중국의 법은 어디까지나 국가에 의해 성문화되고 해석되었다. 지방이나 베이징어디에도 독립적인 사법기관은 없었다. 지방에서 사법의 대표로 활동하는 인물은 현의 우두머리인 지현이었다. 각 성의 순무나 재판감독관은 사건의 재심을 베이징의 형부로 올릴 수 있었다. 원고에 의한 상고 역시 가능했지만 그것은 오직 고위 관료로 구성된 법정을 정점으로 하는 확고부동한 계서제 안에서였다. 사형선고는 지현의 상관에 의해 재심되었고 형식상으로는 사형 범죄에 대한 최초판결은 황제를 거쳐야 했다. 특히 반란이 일어난 경우는 반란자를 즉각 처형시켜 동조자들의 기를 꺾어 놓고 다른 동료에 의해 구출되는 일이 없도록 했다. 이는 외국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법은 매우 엄하였으며 대개 곤장을 쳤는데 이 곤장에 의해 불구가 되거나 죽은 자가 많아 중국인은 일반적으로 법을 두려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