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정치외교 형성과 목적
본론
- 초기 외교 ; ‘신라’라는 국가의 공인
2-3세기에 걸친 斯盧國의 진한 통합 노력을 통해서 4세기 초에 이르러 新羅라는 국호를 성립시키게 된다. 『삼국사기』 基臨尼師今 10年(309)條 : 復國號新羅
4세기 이전의 외교관계가 ‘辰韓’이라는 세력의 이름으로 전개되었다면, 4세기 이후는 신 국가 신라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奈勿尼師今 26年(381)條. 신라라는 국명으로 前秦에 사신을 파견했는데, 전진왕 堅이 ‘海東의 일이 전과 같이 않다.’ 라는 기록 근거
광개토대왕비 - 고구려의 외부세력을 진한이 아닌 신라로 명시
물론 4세기 이전에도 사로국은 진한의 맹주국으로 군림하면서, 3세기 후반에는 사로국왕이 진한 세력을 대표해 晋에 조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진한은 마한에 다소 종속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조에 의하면 ‘사로국왕은 진한을 대표하는 주도세력이면서도 사대의 예로써 마한왕에게 조공해야 했다.’라는 기사가 그 근거이다. 이러한 종속관계가 사로국의 진한 통합과정에서 해소되면서, 신라는 신 국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외교전에 뛰어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신라가 본격적으로 외교에 뛰어든 이 4세기의 동북아 정세는 복잡하였다. 일단 4세기 초 중국의 西秦은 八王의 난과, 匈奴, 鮮卑, , 羌, 族(갈족) 등의 침입을 받으며 멸망하고, 중국남부에는 사마광이 동진이, 북부에는 五胡 十六國이 자리잡게 된다. 이런 중국의 분열은 신라라는 국가를 공인받는 데 있어 한결 수월하게 한다. 신생국으로 주변국가와 갈등을 겪는 상황에서 한반도의 한 국가와 정치적, 경제적 교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그들에게 이득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한반도에는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멸망하게 된다. 여기서 한군현의 멸망은 중국과의 간접적인 연결 창구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중국과의 직접 교역만큼은 아니었으나, 교역을 통한 경제적 이익이 있었고, 그리고 직접 교역보다 훨씬 안정적이었다. 한군현의 멸망은 중국과의 직접 교역을 강제하게 했던 것이다.
신라 내부의 사회·경제·문화적 변화도 외교관계 확보에 영향을 주게 된다. 철제농기구와 우경의 도입 및 수리시설의 정비는 농업생산력 증대를 통한 잉여생산물을 만들게 되고, 사회 분업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경제적 교류가 시급해졌던 것이다. 문화적으로는 새로운 종교 ‘불교’가 등장하면서 불교문화를 수입·보급하는 데 있어 상대적으로 문화적 측면에서 우위에 있는 국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절실했을 것이다. 초기 신라의 대중국 외교가 승려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었다는 것이 그 근거다.
- 후기 외교 : ‘통일전쟁’이 아닌 이해관계의 일치
① 중국의 이해
6세기 말 수·당제국은 중국을 재통일하고 자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질서를 주변 모든 국가와 세력에 강요하게 된다. 이러한 중국의 정책은 동북아시아의 패권 구체적으로는 중국 동북부 지역의 거란, 말갈 등의 이민족에 대한 지배권 다툼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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