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삼기영어학교(三岐英語學校) 고등과에 입학하였으나 1936년 부모의 강권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귀국하였다. 같은 해 신석정(申夕汀)의 소개로 알게 된 전라북도 김제 출신의 박영규(朴榮奎)와 혼인하였다.
비교적 많은 교우·문우와 친교를 맺었다. 고보 시절에는 훗날 ≪삼사문학 三四文學≫을 창간한 정현웅(鄭玄雄)·이시우(李時雨)·한노단(韓路壇) 등과 더불어 습작 활동을 하였다.
고보 졸업 후에는 서면으로만 알아왔던 김억(金億)과 두터운 사제의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또한 신석정·박영희(朴英熙)·최재서(崔載瑞)·오장환(吳章煥)·김기림(金起林)·정지용(鄭芝溶)·서정주(徐廷柱) 등과도 친교를 맺었다.
1944년 아버지가 경영하던 배천의 온천을 경영하다가 1948년 서울에서 출판사 산호장(珊瑚莊)을 경영하면서 김기림 등 문우들의 시집을 발행해주기도 하였다.
1950년 6·25 때에는 종군작가단에 편성된 문인들과 어울려 ≪전선문학 戰線文學≫을 간행하였다. 1954년에는 서울신문사에 입사하여 출판국장을 역임하면서 ≪신천지 新天地≫와 학생문예지 ≪신문예 新文藝≫를 주간하기도 하였다.
1959년에는 한국시인협회 부회장, 1966년에는 회장에 선임되었고, 1968년에는 신시60년기념사업회(新詩六十年紀念事業會) 부회장을 역임하다가 1975년 10월에 사망하였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31년 ≪동광 東光≫지 독자투고란에 습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으나, 같은 잡지 1932년 5월호에 시 〈봄노래〉가 김억(金億)의 추천을 받음으로써 정식으로 등단하였다.
이 후 ≪조선일보≫에 〈물장난〉·〈동무여!〉(1932.7.3.), ≪동광≫에 〈마을의 여름밤〉(1932.10.)·〈정처없이 떠다니고 싶지 않나?〉·〈자네는 와서〉(1933.1.), ≪신동아≫에 〈나비여!〉·〈알밤〉(1933.10.)·〈비 걷은 아침〉(1933.4.) 등을 계속 발표하였다.
한 이미지스트의 경향을 지닌다.
2. 작가의 작품경향
장만영 전집(2006) / 장만영전집간행회 / 글나래
장만영 시 연구(2005) / 김세영 / 성신여자대학교
재봉틀의 국어방 / http://blog.naver.com/kwank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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