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토기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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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구려 토기 레포트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옛 고조선의 영역을 회복하고 계승한 고구려는 700여 년간 우리 역사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하였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冬佳江)유역의 환인(桓仁) 지방에서 건국하였다가 기원후 3년 집안(輯安)으로 천도하였고, 압록강과 훈강 유역에 자리 잡기 시작한 고구려는 태조왕(52~146?) 때에 왕위계승권이 확립된 후 2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이 이루어진다. 미천왕 14년(313)에는 낙랑군을 축출하고 대동강 유역을 차지함으로써 명실공히 대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춘다. 소수림왕(372~384)때 국가의 체제를 재정비하여 불교를 수용하고 태학(太學)을 설립하며 율령을 반포하여 중앙집권적 귀족 국가의 체제를 갖춘다. 이와 같은 국내의 안정과 발전은 광개토왕(391~413)이 대외적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원동력이 되어 요동을 차지하였으니 이를 증명해 주는 것이 만주 통구지방에 남아있는 광개토왕비석이다. 광개토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413~491)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겨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크게 발전시킨다. 한편, 계속적인 정복 사업을 펼쳐 475년 백제의 한산을 함락시켜 고구려는 대제국을 형성하며 최전성기를 이룩한다. 姜敬淑,『韓國陶磁史』, 一志社, 1990, p45~46.
아시아의 넓은 대륙을 활발하게 오가던 유목민 문화와 농경 정착민 문화가 혼합된 독창적인 문화를 꽃피웠던 고구려는 이동과 정착 생활에 편리한 여러 가지 토기를 개발하였다.
고구려 토기의 기본적인 특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고구려 토기는 몇 가지 특징을 나타낸다. 첫 번째로 연질 종류와 흑색 계통의 경질 토기가 있고, 두 번째로 중국의 영향을 받은 연유(鉛釉)가 시유된 시유란 초벌구이한 기물(器物)에 유약(釉藥)을 바르는 작업을 말한다.
녹유 토기 녹유 토기 중에서 삼국시대 토기 가운데에는 경질 토기에 녹색 유약이 자연스럽게 덮인 토기가 많다. 그 녹색 유약은 도기 소성 중 가마 내에서 연료로 쓰인 나무재가 소성 중인 도기에 앉아 고온에 녹아내린 결과 만들어진 것이다. 나선화,『한국의 전통공예 도기』,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6, p37.
, 황갈유 토기가 중국 육조(六朝) 칠무늬토기의 영향으로 간주된다. 姜敬淑,『韓國陶磁史』, 一志社, 1990, p50.
있다. 두 가지 특징을 정리해보면, 고구려 토기는 초기에는 연질 토기에서 출발하여 회흑색 계열의 경질 토기로 고대 국가들이 각자 독자적인 영역과 문화를 형성해 가는 기원후 3세기경에는 한국의 토기 생산 기술이 일대 변혁을 이루어 반지하식 굴가마에서 1,100℃가 넘는 높은 온도로 소성하는 단단한 회색 경질 토기의 생산이 더욱 활발해진다. 나선화,『한국의 전통공예 도기』,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6, p35.
, 중기 이후부터는 유약을 입힌 토기가 등장하게 된다. 유약을 입힌 토기가 등장하는 것은 원삼국시대 토기와 가장 차별되는 점이다.
세 번째로 기형은 다양하며 실용적인 성격이 강하다. 기형은 항아리 둥근 몸체에 짧은 목이 달린 그릇으로 고구려 유적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는 유물이다.
병 자배기 두멍 동이 자배기 또는 버치라고 부르며 음식물 조리 준비용이다. 고구려인이 가장 많이 쓰던 토기의 하나이다.
버치 시루 음식물을 쪄서 익히는 그릇으로 바닥에는 구멍이 뚫려 있고 몸체에는 띠고리 손잡이를 달았다.
바리 개인용 식기로 쓴다. 고구려 초기부터 사용했으며 오늘날의 사발과 같은 형태를 보인다.
대접 보시기 잔 벼루 등이 있으며, 이 중에는 뚜껑이 있는 것과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것, 어깨에 귀가 붙은 것 등 다양한 것들이 있다. 그릇 중에는 항아리 류가 많고 크고 작은 항아리의 몸체는 둥근 것과 타원형으로 되었으며, 아가리가 넓고 좁은 것 등이 있다. 네 번째로 무늬는 돗자리무늬나 타날무늬 계통은 거의 없고 항아리 어깨부분에 무늬대를 만들고 간단한 물결무늬, 톱니무늬, 노끈무늬 등이 음각(陰刻)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민무늬가 가장 많다.
고구려 토기는 중국의 요동 지방으로부터 한반도 한강 유역에 걸치는 넓은 고구려 영역에서 출토되었다. 고구려는 지정학적 입지 조건으로 말미암아 자연히 중국의 토기 유형인 와질 토기 내지 검은 와질 토기계통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토기들은 4세기 이전에 조영된 고구려의 돌무지무덤에서 출토되는 예가 많아 껴묻거리 용도로 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57년 사망한 황해도 안악(安岳) 고구려 고분인 동수묘(冬壽墓) 3호분 동실(東室) 북쪽 벽화를 보면 부뚜막에는 두멍이 있고, 우물가에는 두 개의 큰항아리와 두멍 동이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에 이미 회흑색 토기가 가정에서 많이 사용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최근 한강 이북의 고구려 군사 요새인 구리시의 아차산성과 서울 구의동 유적에서 생활용기로 쓰인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면서 남한에서도 고구려 토기의 규모와 특징을 접할 수 있다. 특히 구의동과 아차산성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들의 기본적인 기형 조합은 요즈음 장독대에 놓여져 있는 시루 물항아리 젓독 물동이 장독 뚜껑들과 형태가 거의 같고 종류도 유사하여 고구려의 토기 문화가 한반도에 전승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실증 자료가 된다. 입 넓은 큰 항아리와 동이에는 넓은 띠 손잡이를 붙여 놓은 것이 특징인데 운반에 용이하도록 설계한 것이다. 특히 양옆에 넓은 띠 손잡이가 옆으로 달린 동이는 그 형태가 발해에도 그대로 계승되고, 고려 시대를 거쳐 현대의 옹기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국시대의 다양한 토기 가운데 고구려 토기 항아리의 형태와 종류는 무엇보다도 근대의 옹기에 가장 강하게 반영되어 있으므로 현재 한국 옹기 형태의 시원은 고구려 토기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 토기는 고조선 청동기 시대 무문 토기와 중국 황하 이북의 신석기 시대 앙소 문화의 토기 가운데 바닥이 편평한 토기 항아리에 그 형태의 연원이 있으나 중국의 한문화(漢文化)가 정착하면서 중국 전역에 확대 된 한나라의 토기와는 그 계통을 달리하고 있다. 또한 가야와 신라의 밑바닥 둥근 회색 토기들과도 형태를 달리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옹기 형태의 연원을 간략히 살펴보면 북방 유목민이 정착하면서 만들기 시작한 중국 북방의 앙소 홍산 문화에서 고조선, 고구려로 이어지는 독자적인 문화권의 산물이다. 바닥이 편평하고 입이 넓으며 몸체가 둥근 큰 항아리는 이동적인 유목 문화권이 정착 농경생활로 전환되고 저장 용기의 사용이 늘어나면서 제작이 활발해지고, 한국인은 도기로 만든 항아리를 애용하는 독특한 도기 문화를 이루었다. 나선화,『한국의 전통공예 도기』,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6, p111.
2. 고구려 토기를 통해 본 생활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