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 같은 일본의 식민지 문화정책 아래서도 저항 주의적 학문 활동 및 문화활동은 꾸준히 계속되었다.
문화운동의 활동
1. 민족교육운동
1)교육진흥운동
교육진흥운동의 대표적인 단체로는 조선교육회가 있다. 일제 침략 하에서, 한국인의 초 등학교 진학률은 일본인의 6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현상은 상급 교육기관으로 갈수록 더욱 심하였다. 3?1운동 이후 일제 식민통치의 변화로 교육시설이 확장되었다고 하 지만, 그것은 일본인을 위한 교육시설의 확장인 것이며, 한국인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정규학교에서의 교육은 철저한 식민지 교육으로서 한국인을 위한 민족 교육은 거 의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민족 교육 기관으로 사립학교, 종교 계통의 학교, 개량 서당, 강습소, 야학 등이 있었다. 이들 교육 기관은 비록 그 규모는 작았지만, 민족의식 향상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 아래에서 한국인을 위한 한국인 본위의 교육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 갔다. 이러한 민족적 요구에 부응하여 한규설, 이상재 등의 민족 지도자들은 조선 교육회를 조직하였다. 조선 교육회는 한민족 본위의 민족 교육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라 하여 대학의 설립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조선교육회는 총독부에 대학 설립을 요구하였으나 이것이 묵살되자, 우리 민족의 손으로 대학을 설립하려는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본격화 되었다.
민족 교육 진흥 운동의 중추적 역학을 하던 조선 교육회의 노력으로 이상재를 대표로 하는 민립 대학 기성 준비회가 결성되었다(1922). 이 준비회 에서는 경향 각지에 취지서를 보내어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고, 각지에 대표를 파견하여 사회 유지들을 설득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각지에서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그 이듬해 서울에서 발기인 총회를 개최하였다. 이 모임에는 민립 대학의 설립을 열망하는 각처의 대표들이 참가하여 대성황을 이루었으며,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이 기성회는 대학 설립이 한국인의 재력과 노력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각지에 지방부 조직을 서둘렀다. 이와 같은 원칙 아래 1000만원 모급 운동을 전개하였다. 전 민족의 참여를 위하여 100여개소에 지방 조직이 구성되었으며, 만주, 미국, 하와이 등 해외에서도 모금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많은 사회단체의 후원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일제의 방해 공작으로 중도에서 좌절되었다. 일제는 이에 대신하여 경성 제국 대학을 설립하여 한국인의 불만을 무마하려 하였다.
2)민중야학운동
한일합병 초기에는 신교육은 민족관념을 말살하고 일본 동화정책에 따르는 것이라 하여 일반적으로 기피하였으나 3?1운동과 6?10만세 운동에서 학생들이 전위적인 역할을 담당한 후부터는 조국의 장래 운명은 마땅히 신교육을 받은 청년들에게 기대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이리하여 신교육 열이 크게 진흥하게 되었으니 1920년대에는 실력배양운동과 학원 설립운동이 활발하여 사설학원과 강습소, 야학 등의 설립이 격증하였음은 민족의 신교육에 대한 열망을 반영 한 것이다.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한국독립운동과 종교활동」, 2000
노영택, 「한말 국민국가 건설 운동과 국민교육」, 신서원, 2000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 독립운동사」, 탐구당,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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