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가족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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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종대왕의 가족윤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2008년 1월부터 민법상 호주제가 폐지된다. 이로써 주자가례의 도입 이후 오랜 세월 한국 사회를 지배한 남성 중심의 가(家) 구성이 큰 변화를 앞두고 있다. 가족이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집단이라고 할 때, 가 구성의 시대적 변화는 조선 사회에서 현대에 이르는 거시적인 사회 변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가족 윤리는 변화하는 여성의 지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세종의 통치 기간은 주자가례의 도입이 본격화된 시기로 이 때에 사회 규범은 성리학적 윤리관이 적극 반영되었다. 이 글에서는 세종대에 행해진 조선의 혼인제, 간통에 대한 규제 등 성리학적 윤리관에 기초한 조선사회의 가족윤리를 통해 그 시대를 살펴보고 이에 관한 세종의 정치를 알아보고자 한다.
2. 세종대의 가족 윤리
1) 일부적 일부일처제
조선을 건국한 사대부들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성리학 이념을 조선의 정치에 적극 도입하여 이념에 충실한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사대부들은 여말 이래의 다처풍조를 척결하여 일부일처제를 확립하고자 했다. 妻妾制(처첩제)는 용인하면서 정처는 1인만 두도록 했으며, 부녀의 개가에 대한 규제를 점차 강화해 개가한 부녀의 자손의 仕路(사노)를 제한함으로써 부녀의 개가를 간접적으로 억제했다. 그러나 부녀에 대한 개가 규제는 한 여자가 종신토록 한 남자에게만 얽매이도록 강제한 반면, 남자의 중혼에 대한 규제는 한 남자가 동시에 두 여자와 혼인관계에 처하는 것만을 금지한다는 의미에서 일부적 일부일처제(一夫的 一夫一妻制)의 성격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가부장적 형태는 혼인, 이혼, 간통 문제 등의 대처 방식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2) 중혼 금지
조선 초기에는 중혼행위를 강력히 단속하고자 했으나 사가에서 사사롭게 행해지는 중혼을 모두 적발해 낼 수는 없었다. 중혼자에 대한 처벌은 의 妻妾失序律(처첩실서율)로 처벌한 사례로 세종대의 成均館司成(성균관사성) 이미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세종7년에 이미가 아들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처를 버리고 改娶(개취)하여 장인에게 고발당하자 사헌부에서 "비록 아들이 없더라도 더불어 부상 3년을 지냈으면 의리상 내쫓을 수 없다" 라고 하며 三不法을 이유로 이혼을 무효화시키고 전처와 完聚(원취)하게 할 것을 청하여 세종의 윤허를 받았다. 이 때 장형의 처벌만은 사유의 혜택으로 면제되었다. 권 55, 세종7년 7월 갑술
이에 이미가 글을 올려 처가 45세가 되도록 아들이 없어 부득이 처를 내쫓고 재혼할 수 밖에 없었던 사실과 그 동안 사헌부와 장인의 탄핵의 부당함 등을 설명한 다음, "만약 조부의 마음으로 본다면 어찌 絶嗣(절사)를 가볍게 여기고 함께 상을 치른 것을 무겁게 여기겠습니까. 無子法 一條는 상정에 있어서는 소홀히 할 수 있는 바이나 윤리에 있어서는 관계되는 바가 극히 중하니 인자의 죄로 불효보다 큰 것이 없으며 無後가 으뜸이 됩니다" 라며 자신의 棄妻(기처) 행위를 정당화 하려 했다. 권 29, 세종7년 11월 신해
그러나 결국 국가의 명령을 거역하고 전처와 원취하지 않으려 했다하여 妻妾失序律에 의해 장 90과 관직삭탈의 처벌을 받았다.
3) 간통에 대한 처벌
조선을 건국한 사대부 집단은 고려 지배계급의 부패에 대해 성리학적 이념을 통한 도덕성 회복을 표방해 개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특히 간통은 三綱 중 부부관계에 위배되는 것으로 여겨 엄벌에 처했다. 세종 15년 이진문의 처인 사족녀 어리가와 사족 이의산의 간통 사건에서 처음에는 이들이 사족층이라는 이유로 남녀가 동일하게 유배형을 받았으나, 이후 이의산은 계속 형이 면제되어 세종 21년에는 고신까지 환급받기에 이르렀다. 권 85, 세종21년 4월 신묘
이에 헌납 황보공이 이의산의 고신을 환급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자, 세종은 어리가의 일상적인 행실이 淫奔(음분)하다는 점을 들었다.
“만일에 사대부의 처를 간통했다면 그 죄가 무거운 것이다. 그러나 감동(甘同)과 같이 조사(朝士)로서 간통한 자가 하나 둘이 아닌 것에 이르러서는, 이는 곧 계집이 음분(淫奔)한 탓이므로 그 간통한 사람들은 역시 다 용서함을 받아 벼슬을 받았다. 내가 듣건대, 진문(振文)의 처는 거문고를 타고 노래하고 춤추며 음란하고 방탕하여 거리낌이 없다고 하며, 또 의산(義山)은 팔의(八議)의 친척이기에 고신(告身)을 돌려주라고 명한 것이다. 내 마땅히 의산의 죄를 조사해서 다시 생각해 보겠다.” 권 85, 세종21년 4월 을미
참고문헌
※ 참고자료
1. , 국사편찬위원회 http://sillok.history.go.kr/
2. 장병인, , 일지사, 1997
3. 이배용 외, , 청년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