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엠마 행복한 돼지 그리고 남자 - 영화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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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행복한 엠마 행복한 돼지 그리고 남자 - 영화 감상문 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영화 를 보고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또 그렇게 되기 위해서 노력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누구도 행복이란 하나로 ‘행복은 이거다.’라고 완벽하게 정의내릴 수 없을 것이다. 예전에도 그랬겠지만 요즘에는 특히 더 외형적이고 물질적인 것 이를테면 돈이나 잘생긴 외모 같은 것들이 행복의 한 구석을 요염하게 넘보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직관적으로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일까? 하지만 역시 이것 또한 정의내리기가 녹록치 않다. 그렇다면 행복해질 수 있는, 행복에 다가가기 위한 어느 정도의 조건들을 통해 거대해 보이기만 하는 행복이란 존재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은 참으로 많다. 이 영화를 보며 좋았던 점은 본능적인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모습, 즉 행복하게 살고 싶어 자신의 감정의 충실한 모습이 여자 주인공, 엠마를 나름 유쾌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최종기한 6주 남은 한적하고 아담한 시골 농장 주인인 엠마(여 주인공)는 돼지, 닭, 오리들을 거느리며 하고 싶은 대로 살며 본능의 충실한 삶을 살아간다. 돈을 못 내서 수도도 전기도 다 끊겨버렸지만 그래도 그녀는 농장 식구들과 나름 행복하게 산다. 그러던 어느 날, 비 가 너무 많이 오는 바람에 차 사고가 나서 뜻하지 않게 엠마네 집으로 막스라는 남자가 오게 된다. 막스는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얼마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남자이다. 그는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친구가 모은 뒷돈을 가지고 멕시코로 가려다가 사고로 인해 엠마의 농장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남자 주인공은 결벽증 환자처럼 나오는데 왠지 이걸 보고 연애를 할 때도 이런 식으로 깔끔하게 굴었을 것 같아 연애도 제대로 못해봤을 것 같다는 당연한 생각이 들었었다) 둘은 그렇게 우연히 만났고 물과 기름처럼 다른 점이 많아 좀처럼 융화될 것 같지 않았지만 그들은 차차 서로에 대해 마음을 열다가 그런 그들이 사랑하게 되고 결혼도 하게 된다. 하지만 췌장암에 걸린 남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그는 엠마가 돼지의 목을 따서 최대한 고통 없이 죽이는 모습을 보면서 엠마에게 부탁을 한다. 나도 그렇게 죽여 달라고……. 죽을 때 최대한 고통 없이 행복하게 죽고 싶다고…….
엠마는 마음이 아프지만 그렇게 그를 행복한 죽음으로 이끌기 위해서 사랑하는 그의 목을 따서 죽이고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난다.
난 이 영화의 결혼식 장면을 재밌게 봤었다. 보통 ‘내가 어떤 사람을 알고 있다.’라는 것은 그 사람의 성격, 이름, 나이, 가족 관계, 외모, 그리고 그 사람이 태어나고 자란 곳 등을 다는 아니더라도 웬만하면 이를 거의 다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내재되어 있다. 그 전제 하에서 그 사람과 내가 서로 통하는 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애틋하고 친구라는 감정보다는 좀 더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 ‘좋아함’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이 좋아함이라는 감정을 통해 사귀게 되고 시간이 지나 그 좋아함이 서로가 서로의 단점과 장점을 모두 다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모습까지도 좋아하며 또 서로 ‘내숭’이란 거품을 다 빼버리고 서로의 오롯한, 순수한 알맹이만 보고도 그를 좋아할 수 있는 것, 그 사람을 좋아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이 아끼고 소중히 생각하고 여기는 것이 ‘사랑함’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영화의 결혼식 장면에서는 결혼 당일 막스가 엠마의 성씨를 처음 알게 된다. 이는 아주 사소하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알고 있다.’는 전제에서 벗어난 과감한 행동이다. 막스는 엠마의 성을 모르면서도 엠마는 막스가 어디에 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자세히 알지도 못하지만 그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 이 모습을 통해 이를 확장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보통 사람들처럼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감정의 충실하거나 생각이 구김 없는 하얀 도화지처럼 열려있는 것, 이 같은 순수한 자유로움에서 저것이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보다 영화를 보며 가장 충격적이면서 감동적인 부분은 엠마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막스를 직접 죽음의 문으로 인도했던 모습이 필자에겐 굉장히 아름답고 가슴 설레었던 장면이었다(음… 이상하게 오해는 안했으면 좋겠지만 뭐 오해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자살, 안락사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행동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마음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장면을 보고 난 후 생각이 조금은 달라졌다. 자살, 안락사를 하고 싶어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도 자기애로서의 발현이겠지만 자살을 하는 것도 안락사로 인해 생을 마감하는 것도 지독한 자기애로부터 나오는 가장 절정의 마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을 위해 몸을 던지는 자살 등을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살이나 안락사는 너무나도 힘든 고통을 견디지 못하다가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그것들로부터 도망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자. 자살과 안락사는 정말로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견디다 못해 결국 무기력하고 비열하게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자신이 저항할 수 있는 최고의 극단적인 방법으로 가장 떳떳하고 가장 맹랑하게 그 고통을 받아들이는 행위가 아닐까? 이는 도망이 아니라 가장 떳떳하게 그 고통을 몸소 받아들이는 행위이며, 이런 의미에서 아마도 엠마가 막스를 직접 죽음으로 이끌었던 것은 사랑하는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자 가장 행복하게 죽을 수 있도록 빌며 그녀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을 것이다.
과연 내가 엠마라면 그 큰 용기를 가질 수 있었을까? 나라면 저럴 수 있을까? 글쎄….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 없이 죽여 달라는데 그 부탁을 안 들어줄 수도 없고 들어주자니 말도 안 되는 거 같고. 아마 필자라면 그런 상황에서 엠마처럼 행동을 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그저 묵묵하게 그의 곁에서 그를 바라봐주는 인내를 발휘하지 않을까?
또 다른 행복의 조건. 기쁨, 즐거움, 긍정적인 마음들. 이것들은 우리들의 마음 속 가장 밑바탕에 깔려있는 행복의 조건인 것 같다.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도 그 음악이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하고 아무런 감흥도 없다면 그것은 정말 참혹할 정도로 피폐하고 불행한 삶이지 않은가! 기쁠 때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고 즐거우면 순수하게 즐거워할 수 있어야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은 대부분 긍정적인 마음으로부터 파생되는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긍정적인 마인드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무언가를 제대로 볼 줄 아는 통찰력도 행복의 한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에는 여러 가치들이 난무하고 있고 이 때문에 진실과 거짓을 구별해내기 힘들다. 거짓을 진실로 믿고 이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불행한 일일 것이다. 그 어떤 사람이 와서 거짓을 진실이라고 짖어대도 묵묵하고 냉정하게 진실을 정확하게 바라볼 줄 아는 차갑고 뜨거운 통찰력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혜안이며 거짓을 거짓으로 진실을 진실로 보는 이러한 눈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아마 누구보다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굉장히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하지만 필자가 이러한 조건들보다 더 특별하게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은 따로 있다. 바로 고통과 슬픔이다. 예전에 재밌게 봤던 드라마 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황진이 스승인 백무가 황진이에게 묻는다. "기녀에게 가장 중한 벗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그러자 황진이가 대답한다. "술입니까?" "아니다" 황진이는 다시 묻는다. "그럼… 사랑입니까?" "요망한 년…. 허나 그것도 아니다" 스승이 아니라고 하자 좀 더 생각을 하더니 황진이는 묻는다. "재예입니까?" 그러자 스승은 황진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니다. 기녀에게 가장 중한 벗은… 고통이다." 고통이 어찌 기녀에게만 중한 것이겠는가. 우리들에게도 가장 중한 것이지. 고통과 슬픔이 없이는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더 나아가 행복에도 도달할 수 없다. 이를 피하려고 하고 멀리 두려고 할수록 이들은 우리들 삶의 더욱 깊숙이 파고들어 빼낼 수 없는 가시처럼 박혀있다.
고통과 슬픔은 누구에게나 아프고 힘들다는 것이란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뛰어 넘을 수 있는 의연함이 그 누구보다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고통과 슬픔 없이 행복을 바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만약 있다고 해도 그것은 오래가지 못할 행복이다. 남들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을 겪고 견디기 힘든 슬픔을 짊어졌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 아픔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았던 긴 터널 같은 아픔을 아주 힘겹게 이겨내고 나면 신기하게도 따스한 저녁노을, 공기를 통해 전해져 내 귀에 살포시 앉아서 노니는 음악소리, 나를 따라다니는 순수한 그림자 등 같이 사소한 것들로부터도 커다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 이는 고통과 슬픔을 통해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는 걸 깨닫게 될 때에 찾아오는 참된 행복이다.
결국 행복은 외부로부터 오기도 하지만 결국은 나로부터 내 안에서부터 우러러 나오는 것 같다. 행복의 조건들은 각각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을 거다. 자신의 삶을 무엇이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지에 대해 그리고 그를 위한 조건들을 고민해보고 이를 찾아서 좀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행복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도록 나 스스로 노력해야겠다. 그렇다면 행복은 어느새 내게 다가와 그 무엇보다 포근하게 나를 감싸 안아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