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일레븐의 돈 조반니와 리비도의 비극적 시퀀스
서론
작품을 정하고 비평의 밑그림을 그리는 내내 돈 조반니의 영상이 뇌리를 떠돌아다녔다. 돈 조반니에 대한 언급은 동일 작가의 다른 작품 「거울에 대한 명상」에 등장하는 것이지만, 온 유럽의 여자들에게 지분거리며 난장을 까다 끝끝내 지옥에 떨어지는 형벌을 받는 돈 조반니의 일대기가 고압선의 주인공에 오버랩 되었다는 사실을 떨쳐 내기가 힘들었음을 인정한다.
첫인상의 영향력이란 강력한 법이어서, 종종 이후에 벌어지는 모든 연상들을 첫인상의 영향력 아래 일렬종대로 종속시키곤 한다. 논리에 대한 일종의 헤게모니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 그리하여 프라이가 지적한 대로, 프라하에서 초연된 이후 200여 년에 걸쳐 서사과정의 변혁을 겪은 끝에 20세기의 끝에서 비루한 은행원으로 환생한 돈 조반니를 상상하며 비평을 준비하곤 하였다. 그 과정에서 비롯될 오류에 대해서 철저히 외면하였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투명인간에 대한 명상
모든 인간의 존재 단위는 육체이며, 그리하여 인간은 중력의 영향을 받으며 타인의 가시 범위 내에서만 존재한다. 육체로부터의 탈선에 대한 욕망적 상상이 앞의 전제로부터 탄생한다는 사실은 자못 필연적이다. 투명인간을 소재삼은 텍스트의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다는 사실은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영화, 소설, 연극, 희곡, 심지어는 음란물에서까지 투명인간을 소재삼는 경우가 있다. 가시의 세계에서 탄압받는 모든 욕망의 탈출구로서 투명인간의 이야기는 매너리즘에 빠질 새도 없이 꾸준히 답습되어 왔다. 이를 리비도의 해방적 시퀀스라 명명해도 좋으리라. ‘만약 투명인간이 된다면’으로 시작되는, 상투적이고 비루하면서도 보편적인 단상들― 여탕에 들어가 본다거나, 짝사랑하는 이의 집으로 찾아가 그(녀)의 일상을 훔쳐본다거나, 금지된 구역으로의 출입을 꿈꾼다거나, 가시적 알리바이의 지배를 받는 윤리의 사각을 함부로 만끽한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그러나 투명인간이 된다는 사실이 온전한 리비도의 해방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당연하지만 모두가 잊고 있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한데, 그것은 투명인간으로 변하는 행위가 결코 불가역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투명인간이 된다는 것, 즉 시계를 벗어난다는 사실은 그것만으로 자기 정체성의 고립을 의미한다. 생각해보라. 자기 정체성의 증명을 존재론의 영역에서부터 매번 새출발해야 하는 입장에 처한 이의 고뇌를. 김영하의 「고압선」은 이러한 사실을 서슴없이 지적한다.
「고압선」의 서사 구조
고압선의 표면적 서사 구조는 단순하다. ‘사랑을 하는 순간 사라진’다는 점쟁이의 예언을 들은 주인공이 우연히 자신의 직장에 고객으로 찾아온 옛 사랑을 만나 불륜에 빠지면서 결국에는 투명인간이 된다는 이야기. 이 서사의 중심에는 ‘투명인간’이라는 소재가 가로놓여 있는 바, 그 역할을 규명하는 것은 「고압선」을 논함에 있어 꽤나 중요한 작업일 것이다.
다비드 작 「마라의 죽음」을 볼 때처럼, 투명인간의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시점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문제에 우선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바, 투명인간은 결과인가 메타포인가에 대한 문제가 그것이다. 돈 조반니에 대한 연상이 끊임없이 「고압선」의 서사에 틈입하였던 이유가 이것인데, ‘투명인간’을 서사의 결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주인공이 저지른 불륜, 금지된 욕망에 손을 얹었다는 사실에 대한 단죄가 될 것이다.
욕망을 탄압하는 가시의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주인공은 불륜의 대상이 옛 애인이자 끝없는 질투의 원천이었던 B와 다시 몸을 섞는 장면을 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그들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둘의 육체적 관계에 개입할 자격을 상실해버린다. ‘그녀와 마지막으로 멋진 섹스를 함’으로써 욕망으로부터의 졸업과 동시에 일상으로의 회귀를 꿈꾸던 그의 의도는 이로써 끝끝내 유예된다. ‘갈비와 물김치가 못 견디게 먹고 싶’다는 사소한 욕망조차 스스로 충족할 수 없는 지위로 떨어져버린 그는, 탑골공원 한가운데서 누구도 자신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로 멍하니 타인의 소통을 응시하며 시간을 보낸다. 아마도 영영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에게 투명인간이 되었다는 현실은 지옥불에 견주어도 과하지 않을 치명적인 형벌이다.
그러나 주인공에게 닥친 투명인간의 현실이 그다지 개연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이 한 가지의 불가해한 의문점을 여전히 제시한다. 어째서 그는 투명인간이 되어야만 했는가.
‘투명인간’이라는 메타포의 의미
그렇다면 결과가 아닌 비유로서의 투명인간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생기는 바, 투명인간을 작가가 표현하려는 일종의 메시지적 수단으로 가정함으로써 한 가지의 힌트를 얻는 것이 가능하다. 의외로 그 힌트는 첫 문장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어느 날 그 남자는 희한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는 문장에서, 남자는 주인공으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았음에도 ‘그 남자’로 명명된다. 욕망적 열등감으로 점철된 청춘을 보낸 그는 ‘단지 처음으로 몸을 섞었’을 뿐인 여자와 결혼하고 어머니와 함께 18평 아파트에서 살며 생의 틈바구니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은행 대리라는 설명 이외에 어떠한 정체성도 획득하지 못한다. 이름조차도 없는 그는 소설의 끝맺음까지도 ‘그’ 혹은 ‘그 남자’로만 명명된다.
이러한 사실은 곧바로 그의 일상으로까지 확장된다. 좋은 대학을 나오지도 못했고 줄이 튼튼하지도 못한 그는, ‘섬세하고 꼼꼼하다’는 업무태도만을 담보로 악무한의 노동이라는 메마른 일상에 그야말로 간신히 일상을 저당 잡혀 있다. 투명인간이 되기 전의 그는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독립된 개인으로 인식되고 있는가. 집에서 아내와의 섹스조차 마음 놓고 즐길 수 없는 그는 가족에게 ‘중도금과 자동차 할부금과 생활비를 벌어오는’ 존재이며, 직장에서는 언제든 다른 직원으로 대체될 수 있는 창구 직원일 뿐이다. 표면적으로 별 문제 없이 조용하고 성실하게 스스로의 생을 구가해 온 그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 ‘업무 이외의 일로 동료 직원과 한 마디 말도 주고받은 적 없’는 ‘있으나마나’한 인간만큼의 가치만을 스스로에게 허락한다. 그 이름 없는 삶으로 고단해진 그가 옛 사랑과의 연정이라는 끝끝내 금지된 욕망의 태생적 아름다움에 손을 대는 순간, 그는 투명인간이 되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진 인물이 된다. 수십 년간 제대로 드러내본 적 없었던 스스로의 내면적 욕망을 태어나 처음 정면으로 응시하는 순간 그 사실을 어떻게도 증명할 수 없는 처지로 굴러 떨어져버린 것이다. 그가 투명인간에서 벗어나 다시 가시 범위의 육체를 얻어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이름 없던’ 그에게 주어질 스포트라이트의 조도는 어느 정도일까. 아니, 처음부터 그가 투명인간이 되지 않았더라도 아무 상관없다. ‘그런 날들이 계속, 계속되었다. 바로 오늘까지도’로 끝나는 이 소설이 말하는 그 ‘이어진 날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안타까운 이야기이나 주인공이 처한 현실은 우리의 생과 같은 주파수로 숨 쉬며 도저에 도사리고 있다. 김애란 작 「나는 편의점에 간다」를 보라. 그 ‘거대한 관대’ 속에서 똑같은 얼굴들로 삼각김밥과 콘돔을 고르는 이들을 보라. 편혜영의 단편집 「저녁의 구애」에 등장하는 인물들, 김형중이 언급한 ‘동일성의 지옥’에 빠져 사는 비루한 이들을 보라. 그들 모두는 서글플 만큼이나 우리와 동질적이다. 스스로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중력을 초월하지도 못하며,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스스로의 욕망을 조금씩 거세하며 끝끝내 일상에 저당 잡히기 위해 순응하는 우리는 얼마나 선명한 육체로 스스로의 가치를 부여받는가.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잠재적 투명인간들이다. 없는 것들을 닮았다는 사실만으로 소거되는 가치들이 지닌 색깔의 아름다움이란 어찌나 슬픈 것인지.
참고문헌
김애란 「달려라 아비」, 편혜영 「저녁의 구애」, 김형중 「변장한 유토피아」, 네이버 백과사전 「돈 조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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