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복하는 과학 소로의 낭만주의적 생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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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하는 과학 : 소로의 낭만주의적 생태학
1852년 미국의 중대뉴스는 제14대 미국 대통령 선거와 노예해방운동의 가장 강력한 무기의 하나로 제공된 헤리엇 비처 스토(Harriet Beecher Stowe)의 “엉클 톰스 캐빈” 발표 등이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헨리 소로에게는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매사추세츠 주 동부의 도시)에 봄이 돌아온 사실이 위의 그 무엇보다도 의미가 있었다. 그는 많은 미국인들과 달리 세계 창조의 원초적인 순서가 새해의 도래와 함께 반복되는 것을 보았다. 춘분이 지나고 태양이 더 멀리 북쪽으로 이동하여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물가의 식물이 모습을 나타내고, 다음으로 드러난 돌 위에서, 척박한 토양에서, 방금 서리가 녹은 토지에서 식물이 자라기 시작한다. 날아다니는 곤충, 수생곤충, 지렁이들이 식생 전개와 같이 나타나고, 그 위로 겨울 피난지에서 돌아온 새와 구멍에서 나온 설치류가 먹이와 배우자를 찾아다닌다. 계절의 태동이 발작적으로 일어나면서 고독한 보고자인 소로가 로 부른 그 해도 이같이 시작되었다.
소로는 수십 년 동안 지역의 과수원과 숲을 행복하고 유유자적하게 돌아다녔고 35세에 이르러 한층 더 정확하게 자연과 접하기 시작했다. 그는 독학으로 naturalist가 되었고 유능한 현장생태학자가 되었다. 그는 월든 호(Walden Pond)에 자신의 집을 짓고 지냈으며,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것과 비교하면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다. 멕시코와의 전쟁을 위한 세금납부를 거부하여 콩코드 감옥에 갇혀 하룻밤을 지냈다는 유명한 에피소드에서 볼 수 있듯이, 소로의 사회거부는 확실히 세간의 쾌적한 삶의 방식에서 보면 충격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어디에서나 살 수 있었고 자연계와 쉽게 접하는 방법을 알아냈으며, 그가 전해주는 자연에 대한 태도는 다음 시대의 가장 중요한 유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이 일련의 작품은 영국과 미국에서 낭만주의적 생태사상으로의 이행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소로는 셀본의 길버트 화이트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태어난 마을에서 살아있는 자연의 움직임을 연구하는 일에 만족하고 있었으며, 직업선택이나 집 위치 선택에서도 소로는 의식적으로 길버트 화이트의 삶의 방식을 모델로 삼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두 naturalist는 달랐고 특히 그들이 살던 장소가 다른 점은 중요하다. 헨리 소로는 화이트와 달리 이웃 사람들의 눈에는 존경할 만한 신사가 아니었다. 첫째, 뉴잉글랜드는 무직이라는 게으름에 대하여 너그럽지 않았고, 둘째, 소로 자신이 풍요로움이나 예의범절에 대해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또, 화이트가 셀본의 중세의 오랜 관습과 공예품을 사랑한 반면 소로는 자취를 감춘 원주민의 흔적과 팽창하는 사회가 아직 남겨 놓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원시 미개지를 찾아다녔다. 다음으로 화이트는 독일의 식물 지리학자이자 남아메리카의 탐험가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와 더불어 광범위한 전체론적 관점을 가진 과학자였으며 소로가 자신의 소우주에 적용할 수 있는 생태학적 관점을 제공하였지만 그들과 달리 소로의 생태학적 연구의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목적은 역사적인 것이었다. 즉, 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소로는 원시림의 탐구자로서 분명히 생태학 사상의 전통적인 목가주의에 속한다. 목가주의적 이상은 본질적으로 윤리적인 것이며, 특정한 생태학적 조건과 경제 발전의 척도의 고정된 한 점은 아니었다. 소로를 화이트의 뒤를 이은 다른 목가주의자들에 포함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소로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그는 지적했고 대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대지는 인간의 손에 의해 개량되기를 바라고 있을까, 아니면 인간은 더욱 자연스럽게 그리고 안전하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위와 같이 소로가 과학에서 느낀 양면적인 감정은 그의 다른 생활 영역에서도 반복해서 나타났다. 실제로 이것은 자연에 대한 그의 전반적인 관계의 패턴이었다. 그는 일상생활의 대부분을 되도록 자신의 주위세계에 접근하여, 생명력이 자연 속에서 끓어오르듯이 자신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각을 되살리는 데 사용하였다. 고 그는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를 마치 절대적이고 항상 엄격하게 따라야 하는 것처럼 기술하는 것이 소로의 방식이었다.
소로는 초월적인 관념론과 자신이 이것에 부여한 도덕적인 긴급성의 양쪽에서 랠프 올도 에머슨의 노선을 상당히 충실하게 따랐다. 에머슨은 유니테리안 목사에서 시인이자 철학자로 변모한 인물로 산림보호 운동가 조지 에머슨과 먼 친척이기도 했다. 소로는 1836년에 출판된 에머슨의 유명한 논고 “자연(Nature)"을 읽었고, 이것은 인간과 그 환경에 대한 관계를 시사한 논고로, 적어도 뉴잉글랜드에서는 대학의 많은 새로운 세대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낭만주의적인 생태학 사상의 중요한 계보선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에머슨은 자연은 물질적인 공공재로서 기본적인 가치를 가지며, 거기에는 인간의 상상력의 원천이라는 또 다른 숭고한 목적도 존재한다고 논했다. 물론 이 생각은 정신과 물질은 같고 양자를 서로 반영하는 통합적 영역이라는 괴테류의 대응교설과 상당히 비슷하다. 그러나 미묘하나 결정적으로 다른 것도 있다. 에머슨에게 인간정신은 물리적인 자연과 같지 않은 세계의 중심이었다. 외부세계는 인간정신을 반영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며 더구나 불완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떠한 의미에서도 인간을 전체의 단순한 일부로 보아서는 안 디고 인간은 전체이다. 그리고 전체는 인간의 상상력으로 인간 존재 속에 요약되어 있고 조직화되고 있다. 낭만주의적 운동의 이러한 측면은 헨리 소로가 있던 뉴잉글랜드 환경에서 특히 강했으므로, 그것이 자기 내부와 외부에서 자연을 회복하려고 하는 소로의 노력과 모순이 될 우려가 있는 경우에조차도 도덕적인 진지함이 그의 기서 속에 묻혀 들어가는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을 으로 기술하고, 라고 기술하기도 하였다. 그는 에머슨과 같이 라고 기술할 수도 있었다. 또한 그는 완벽주의자와 같이 에 대한 반드시 올 승리를 위하여 일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소로는 자연에 대한 기술지배의 꿈을 인간의 정신적인 성장에는 유해하다고 거부했다. 이 반응은 물질적인 부의 팽창을 인간을 타락시킨다는 그의 개인적인 금욕주의로 보면 어느 정도 설명될지도 모른다. 그는 자발적인 검소한 생활이 도덕적인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바른 길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기술로 소로가 이교적인 자연주의와 초월적인 도덕적 관점 사이에서 흔들렸음은 명백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정확히 정의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자신의 인생은 본질적으로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자연과 관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예를 들면 1845년 그는 자신의 심리학적 특질에는 을 깨달았다. 그는 한참 후에 이 관찰은 [숭고한 법칙]에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는 1853년에 열린 창가에 서서 꽃향기가 나는 산들바람을 들이쉬면서, 초월적인 격투를 벌인 끝에 라고 중얼거렸다. 그는 1856년에 생각이 미쳤다. 이러한 자기 분석들을 잘 살펴보면 자기 자신의 특이한 생활이 1859년 그가 요약한 는 대단히 보편적인 패턴에 따르는 것임을 상기시킨다. 이것은 모든 경험은 하나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한 것인 동시에 모든 외견상의 모순은 좀더 커다란 유기적 통일 속에서 최종적으로 해결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물질적인 검소에 기초를 둔 생활이었다. 그는 스스로 욕구를 제한함으로써, 자기 본능 속의 외견상 모순을 조정하는 길, 즉 자신의 뿌리와 가지 양쪽에 자양분을 주는 길을 찾아냈다. 는 그의 바램, 다시 말하면 분열시대에서 전체적인 인간으로 있고 싶다는 그의 바람을 표현하기위해 검소함은 훌륭한 방법임이 명백하게 되었다. 동시에 검소의 논리는 소로의 다른 충동, 즉 초월과 진정한 정화의 충동에서도 불가결하였다. 물질적인 위안에 대한 분별없고, 타락한 추구속에서는 정신적 진보가 있을 수 없다고 그는 확신했다.
마지막으로 소로는 덧붙여서 욕망을 억누른 검소한 생활이 뉴잉글랜드에 산림을 회복시켜 유일한 씨앗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소로는 콩코드 주변을 산보하면서 일상생활에서 다른 누구보다도 목가적인 이상을 몸으로 체험했다. 다른 사람이 그의 삶의 방식을 정확하게 그리고 상세히 흉내내는 것은 전혀 그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각자가 자기방식의 구제, 자기방식의 조정, 자기방식의 개성을 찾아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실천에 있어 불완전하고 일관되지 못하였을지는 모르나, 그의 반체제적이고 생태학적인 철학은 후세에 우리의 삶의 방식을 음미하기 위한 사례를 제공했다. 현대의 우리는 허클베리를 따먹거나 다른 방법으로 소로류의 생태학적 친밀함이라 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추구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소로가 자신의 자연의 뿌리를 잘라 버리거나 대지에서의 위치를 잊어버리거나 하지 않고, 인간의 존엄을 위하여 철저하게 노력해야 함을 시사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