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젠크란츠의 추와 추의 자율성
1. 서 론
이 글의 목적은 로젠크란츠에게 있어 추란 무엇이며, 그의 이론 안에서 추가 자율성을 지니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연구하는 미학에서 추는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이후 추한 현실의 역사적 전개와 맞물려 추는 18세기 말부터 자신의 지평을 점차 넓혀 갔다. 예술은 새로운 시장의 형성으로 인해 예술에 요구되는 흥미와 감각적인 자극의 경향성을 띠어감으로서 새로운 미학의 범주를 필요로 하게 되었는데 이 범주가 바로 추이다. 조경식, 추한 현실’의 대두와 추의 심미적 범주화, 『독일언어문학 제 48집』, p.237.
현대 예술에서는 조화로운 미보다 부조화의 미 혹은 추가 적극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추한 것, 낯선 것, 금기시 되었던 인간의 본성, 공포에 대한 관심과 매력이 날로 고조되면서 추는 단순히 미적 병리 현상이나 예술적 도발이 아닌 감동과 흥미를 유발하는 일반화된 미적 범주가 된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서 로젠크란츠의 이론 안에서 추의 자율성을 찾는 것이 가능한지 살펴보고 필자가 생각하는 추의 자율성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2. 로젠크란츠의 ‘추’
‘추’에 대한 논의가 구체화 된 것은 19세기 헤겔주의자들에 의해서 이다. 19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추’의 미적ㆍ예술적 특성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헤겔주의자들은 대부분 ‘추’를 미의 대립 개념, 미 이념의 변증법적 전개의 한 계기로만 파악하면서 ‘추’를 독립적인 범주로 다루지 않았다. 즉, 그들은 미를 전제하지 않고는 추가 존립할 수 없다고 보았고 로젠크란츠도 이러한 맥락 안에 있다.
로젠크란츠(K. Rosenkranz)의 『추의 미학』은 추로 통칭되는 현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글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추는 오직 미에 의존하는 개념으로 미의 부정성으로 존재하고 있다. 카를 로젠크란츠, 『추의 미학』, 조경식 옮김, (파주: 나남 , 2010), p. 64. 이하 이 글의 인용은 본문에 페이지만 표시한다.
추는 부자유가 자유의 가상을 띠도록, 유한성이 무한성의 가상을 띠도록 표현하는 미적조형이다.(184) 자유의 모든 감정과 의식은 미의 근거이며 모든 부자유는 추의 근거이다.(45) 목적이 미 뿐인 예술이 어떻게 추를 형상화할 수 있었을까? 예술이란 비록 감각적 요소를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이 감각적 요소로써 미라는 이념의 현상을 총체적으로 표현하려 한다면 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술이 그 이념을 단순히 일면적으로 표현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추는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56)
로젠크란츠가 생각할 때, 추를 독립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예술의 개념과 모순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추를 독립적으로 본다는 것은 추가 자기목적을 지닌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추의 부차적 본성을 보이게 해야 하며, 추란 원래 스스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미에 의존해서 미의 부정성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로젠크란츠가 추를 독립적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로젠크란츠의 추가 독특한 점은 ‘코믹을 통해서 스스로 자기 부정을 거친 추가 미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자유로운 부자유는 특징적인 것을 개성의 유한한 측면으로 절대화하고 그럼으로써 이상과 분열되지만 가상적 실재와의 화해를 이룬 상태로있고 이런 모순을 통해서 관찰자에게 웃음거리를 제공한다.(189) 이상과 분열되지만 가상적 실재와 화해를 이룬 것(가상을 통해서 이상의 모습으로 갈 수 있는 것), 모순을 통해서 관찰자에게 웃음을 주는 것, 이것이 캐리커처이다. 캐리커처는 추의 극단적인 모습으로 미로 넘어가는 계기를 제공한다. 로젠크란츠가 말하는 캐리커처는 자유로운 부자유로 부자유한 개체를 통해서 자유를 드러내는 것이다. 필자가 볼 때는 바로 이 부분이 로젠크란츠의 이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추의 자율성이다. 단, 부자유한 개체가 자유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코믹을 선택한 점, 추를 ‘미의 변증법’의 수단으로 생각해서 미에 종속시킨 점 등의 한계를 지니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비단 미가 아니라 추를 통해서도 자유를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3. 추의 자율성
로젠크란츠는 추가 코믹을 통해서 미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럼, 코믹을 통하지 않은 추는 미가 될 수 없을까? 전쟁의 잔혹함을 현실적으로 표현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거부감을 일으키는 미술작품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작품은 역겹고 추하다. 하지만 그 작품은 전쟁으로 인해 인간이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지 표현함으로써 평화의 중요성을 각성하게 한다. 필자는 추가 그 자체로 미의 이상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코믹은 추를 미로 만들 수 있지만 추가 미의 이상을 떠올리기 위해서 코믹이라는 방법을 필수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추는 그 자체로 자유의 이념을 드러낼 수 있다.
미적 감정과 태도는 결코 초역사적이거나 절대적일 수 없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조건화되고 규범화된 관습에 근거한다. 추에 대한 감정과 가치판단도 비록 오랫동안 부정적인 범주로 간주되어 왔지만 그것이 사회적 산물이란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라영균, 미적 범주로서의 추, 『세계문학비교연구 제 29집(2009년 겨울호)』, p. 305.
로젠크란츠도 관습의 척도에 따라, 일의 본질이 요구하는 몸가짐의 리듬에 따라 행하는 것이 미라고 설명한다.(300) 그렇다면 미와 추는 학습된 것이며 사회마다 다르게 제시될 수 있다. 그럼, 다시 물어보자. ‘무엇이 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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