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가소개 - 柳 宗 元
1) 생애
字는 자후(子厚). 당의 하동(河東: 山西省 永濟 부근)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관료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정원(貞元) 9년(793) 진사가 되어 교서랑(校書郞)남전위(藍田尉)를 거쳐, 정원 19년에는 감찰어사가 되었다. 순종(順宗)이 즉위(805)한 뒤 사회의 전반적인 개혁을 주장하던 왕숙문(王叔文)이 집권하여 여러 가지 정치 개혁을 하였는데 유종원도 왕숙문에게 인정을 받고 거기에 가담하여 상서예부원외랑(尙書禮部員外郞)을 역임하며 활발한 정치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왕숙문의 개혁파가 보수파들에 의해 제거됨에 따라 유종원도 영주사마(永洲司馬)로 귀양 갔다가 원화 10년(815)에는 하급관리인 유주자사(柳州刺史)로 좌천되었으며 이후 다시는 중앙관직으로 복귀하지 못했다. 유주에서 그는 산수간(山水間)을 방랑하면서 시문(詩文)을 짓는 일로 마음을 달래며 이때 많은 저술을 하였고, 또 유주 사람들을 위하여 선정(善政)을 베풀어 사람들이 친부모처럼 따랐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라 칭하기도 하였고, 거기에서 47세로 생을 마쳤다.
2) 문학을 통한 정치적 측면
왕숙문과 함께 개혁에 참여했으므로 유종원은 지은 글에 있어서도 현실에 대한 관심이 한유보다 훨씬 뚜렷하다. 「봉건론」같은 데에서는 옛 봉건제도를 분석하면서 당시 사회의 모순, 특히 문벌세족의 부패한 세력에 대한 비판을 드러내고 있다. 「육역론」도 당시 사회의 귀천문제를 분석한 글이고, 「송설존의지임서」에서는 당시 백성들을 부리던 관료들에 대한 공격이 맹렬하다. 「단태위일사장」에서는 백성을 아끼는 단태위(段太尉)의 행적을 칭송하면서, 군벌들의 잔학한 행위와 인민을 박해하고 살육하는 참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종수곽탁타전」과「포사자설」같은 데에는 나무 가꾸기를 전문으로 하는 꼽추 얘기와 땅꾼이 독사를 잡는 얘기를 하면서 당시 서민들이 당하던 관의 횡포와 과중한 부세의 고통 등을 폭로하고 있다.
3) 문학관
유종원은 문학의 의의가 기본적으로 유가적인 도리의 천명에 있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지만 아울러 도의 천명은 반드시 훌륭한 문장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도 중시했다. 문장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도와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 외형 모두가 중요하다는 다분히 절충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런 중립적이고 절충적인 입장은 내용인 도에 대한 개념 규정에 있어서도 한유와 차이가 있다. 한유가 유가사상을 배타적으로 주장하고 고대 유가의 도통을 자기가 계승하겠다고 자임했던 것과는 달리 유종원은 유가사상에 근간을 두면서 불교와 노장사상 등 제자백가의 학설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유종원의 고문은 서정적이고 온유적이며 글의 성격도 다양한 것으로 평가된다. 「봉건론」「천설」등의 냉철하고 이지적인 논설적 성격의 글과 「종수곽탁타전」「재인전」「편가」「포사자설」등의 풍자의 뜻이 강한 우언문(寓言文)도 많이 남겼다.
유기문(遊記文)이라고 부르는 산수자연과 그 속에서 노니는 감상을 적은 「영주팔기」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림같이 묘사하면서 그 사이사이에 정치적 좌절과 현실에 대한 비판, 인간 세상에 대한 갖가지 감상과 개인적인 고뇌가 함축되어 유기문(遊記文)은 오랜 유배생활을 통해 축적된 다양한 체험과 깊은 생각들을 매우 훌륭한 형태로 형상화하였다.
4) 유종원의 사상과 고문운동
일찍이 왕숙문을 우두머리로 한 혁신 집단에 참가하여 귀족과 환관과 대지주의 특권을 반대하고 혁신운동에 적극적으로 종사하여 다소 폐정을 개혁하였다. 왕숙문 집권 기간동안 유종원은 14년의 폄적생활을 통해 그는 하층민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으며, 또한 많은 중요한 저작을 쓰게 되었다. 그의 저작 총집을 『柳河東集』이라고 부르는데 모두 45권으로 되어있다. 유종원은 唐宋 八代家중의 한 사람이며, 시문이 "뛰어나고 위대하고 정교할뿐만 아니라", 법률 사상사적인 면에도 독창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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