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 중의 개전 의지와 전면전 개시
한국전쟁은 미국과 유럽에서 흔히 잊혀진 전쟁이라 불린다.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전쟁사이에 끼어서 그다지 조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결코 잊혀질 수 없을만큼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고,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소련, 중국 등이 깊숙이 개입한 국제전쟁의 형태를 띄었다.
2차례나 세계 대전을 치르고 유럽을 폐허로 만든 지 불과 5년만의 일이었다. 특히 소련은 2차 세계대전에서 많은 희생을 치르고 승리한 후,
역사는 정전에서 수많은 정치인들의 회합을 기록하였다. 전쟁을 끝낸 지도자들은 서로 평화롭게 지내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토록 맹세한 후에도 새로운 전쟁이 일어난다. 평화를 달성한 뒤 태도를 바꾸는 지도자가 있기 때문이다. 우린 이런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한다.
라고 외쳤으나 결국은 이를 가장먼저 어기고 말았다.
이글에서는 소련이 이 같은 선언을 어떻게 어기게 되었으며, 죽구과 북한은 어떻게 전면전을 결정하게 되었는지 알아볼 것이다.
. 1949년의 위기
한국전쟁의 전면전확대실시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그 이전 상황부터 파악해야 할 것이다. 1948년 남과 북에 서로 다른 정부가 들어선 후 이 두 개의 정부는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해방시켜야 할, 북벌의 대상으로만 파악했다. 이런 상대인식은 충돌을 야기시켰고, 앞서 나온 발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끊임없는 국지전을 발생시켰다. 특히, 미, 소 동시철군안에 따라 미, 소 양군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미군의 뒤늦은 철수과정과 이에 따른 남한의 뒤늦은 진지배치과정에서 유리한 위치를 서로 점하려는 갈등이 이런 국지전을 멈추지 않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국지전은 초기, 남측에서 공세적인 입장을, 북측은 주로 수비적인 입장을 취했다. 남측의 이런 공세는 북한과 소련에게 북침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졌고 1949년 1월 스티코프 : 북침경계, 경비를 강화할 필요성 제기
1949년 4월 극동군 사령관 바실리 : 남한이 3~4개월간 병력을 38선에 집중시켜 새로운 도발행위를 저지를 가능성 보고
, 이에 대한 대책으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지속적으로 대대적인 군사지원과 함께 북침에 상응하는 남침허가 도 요구 1949년 3월 7일 스탈린-김일성 회담기록 : 김일성이 “우리군대는 강하고 남조선에는 강한 빨치산 부대가 지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으나 스탈린은 “남침은 불가하다” 고 못 박음.
하였다. 하지만 스탈린은 남한의 공세에 대한 방어 자원을 지원하면서도 남한 내에 아직 미군이 철수하지 않았고, 인민군이 남한군에 비해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이를 반대하였다.
정병준, 『한국전쟁-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돌베개, 2006
와다 하루끼, 『한국전쟁』, 창작과비평사, 1999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1』, 나남출판, 1997

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