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던 시 논문 Liturgical Poetry by Kirsten Stir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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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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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Liturgical Poetry
by Kirsten Stirling
묵주와 코로나 (Corona)의 연관성이 개신교의 감성에 신경을 거슬리지 않게 묘사된 것처럼(Ch. above) , 던은 어떻게든 그의 호칭기도를 로마식도 개신교식도 아닌 기도문으로 변형시키고자 한다. 그자신의 생각은 없이 그러한 신성한 공공연한 이름을 가져오는 것에 관한 비평을 예상한 던은 그의 호칭기도(litany)가 내 친구인 Chappels을 위한것이다라고 구체화한다(Letters33). 예배시쟝르를 인용하면서 거리를 두는것이 던의 종교시의 많은곳에서 전형적이다. 심지어 그가 Lit에 대한 비밀스런 성격을 강조할 때 그는 비유적으로 ‘Chappels를 불러낸다. 이것이 던의 시를 예배시로 고려하는 것에 반복되는 질문이다.: 어떤 점에서 자신의 생각을 넣지않음이 대중화되는가?라는.
비평가에 의해 끊임없이 논의되는 던의 개인적이고 색다른 재치가 예배시의 장르와 조화를 시키기란 어려울지도 모른다. 어떤 부분에서는 예배에 대한 과장에 관한 선입견 때문에, 또한 부분적으로 기지가 일반적으로 공공의 것이 아니라 즉 공공의 예배 행위의 일부가 아니라 개인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재치는 또한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에 부합되지 않으며 너무 불경스러운 것일 수 있다. 종교적인 주제문제와의 위트의 조화는 또한 명백히 던을 근심하게 하거나 적어도 그를 Lit와 Sidney 둘다에 사과를 넣게하는 원인이되는 것이다. Lit에서 기원중 하나는 재치가 글의 표면상 헌신적인 목적에 대신할수 있음을 암시하면서 묻는다. ‘ 우리가 종교에 감동받을때만 기지를 토해내도록 주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다.’ (When wee are movd to seeme religious / Only to vent wit, Lord deliver us(∥. 188-9)
시드니(Sidney)는 돈호법으로 시작한다.
Eternall God, (for whom who ever dare
Seeke new expressions, doe the Circle square,
And thrust into strait corners of poore wit
Thee, who art cornerlesse and infinite)
I would but blesse thy Name, not name thee now (∥. 1-5)
역설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자연스런 돈호법은 의사소통의 새로운 경로를 열어놓기보다 결국 신성을 제한하게 할수도 있다. 예배시의 규정화된 패턴과 형식에서는 하나님을 정의내리기위해 자발적으로 잠재적인 신성모독을 하는 어떠한 시도도 피한다. 던의 가장 광대한 기발한 생각이 들어간것중 하나인 십자가(Cross)는 십자가의 상징을 바탕으로 단어의 유희 - 이미지놀이-의 힘을 즐긴다. 그 시는 새의 날개에서, 사람의 모습에서, 배의 돛대에서, 세상의 경계에서 발견된 십자가들을 싣고 그 단어의 다른 의미로 가지고 논다.: ‘십자가의 표시를 만들뿐만아니라 지우거나 억제한다.(’therefore Crosse/ Your joy in crosses: ∥.41:2). 그 시 자체가 독자에게 지우도록 그리고 재치의 욕구를 바로잡도록 경고한다. (‘Crosse and correct concupiscence of wit (1. 58)., 그리고 거의 모든 이러한 재치있는 유사함이 Justius Lipsius의 De Cruce(Lewalski 1979:255)에서 나타나는 것을 제외하고 전형적으로 던의 병치를 드러내는것같다. 그래서 던의 재치는 전통적이며 그에게 독창적이지 않다. 유사한 흐름에서 Walter Ong은 성빅토르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작품에서 라틴어 성가에서 위트의 중요성을 입증해왔다. 사실상 재치와 재담은 성육신과 부활에 대한 기독교의 비밀을 역설을 묘사하기위해 적절하게 쓰인다. Ong은 그의 신부에서 던의 이름에 대한 말장난과 성 빅토르의 라틴성가의 몇몇사이에서 직접적인 평행을 그려간다. (315) 이와같이 던의 재치는 예배시에서 그의 시들을 고려하는데에 방해가 있을 필요가 없다; 그와 반대로 그것은 그를 아우구스투스 (Augustine)에 뿌리를 내리고 중세의 재담이 있는 긴 전통으로 연결시켜준다.
던의 화자는 사실상 Annun에서(Patrides 452-4) 비슷한 종류의 재치에 대해 교회의 사용을 승인하는 것 같다. 그는 1608년에 수태고지와 성 금요일의 만찬의 일치를 허락하는 교회력을 만드는 것에 교회의 역할에 관해 논한다.: ‘ This Church , by letting these daies joyne(1. 33) ’this doubtfull day / Of feast or fast 이러한 날들을 기뻐하도록 허락함으로써 교회는 이러한 의심의 날의 존재를 만찬과 금식으로 받아들여왔다. (∥. 5-6) 던은 그가 제일 좋아하는 제목들중 하나를 개발하기위해 기도시를 동시에 사용한다. 나중에 그는 시에서 그의 설교에서 다시 돌아온다: 사람의 삶의 처음과 끝, 즉 원의 둘레처럼, 하나이며 같은 지점이다. 수태고지와 고난은 달력에서 일치하여 그리스도의 삶에 관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반면 던의 화자는 그리스도의 삶의 모델이 모든 인류를 위해 의미있음을 주장한다:
‘Death and conception in mankinde is one (1. 34)‘인류에게 죽음과 이념은 하나이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 행에는- ’And in my life retaile it every day( l 46) ‘내 삶에서 매일 그것을 이야기한다.’- 기도시의 관행을 위해 관련된 모델을 꾀한다.; 이어진 예배시의 찬가가 그것이 기념하는 사건에 관해 묵상을 유도하지만 그것의 메시지는 단 하루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전달되어져야 한다.
비슷한 반영이 교회력, Goodf(Patrides 454-6)에서 한 날짜의 이름을 딴것이 던의 다른 시에 발견될수있다. (흥미롭게도, 교회력에서 이 두시의 정확한 시간의 위치는 어떤 확신을 가지고 적혀진것은 던의 시중 어떤것에도 없음을 의미한다.) 만찬날에 대한 명명은( 제목에서만 일어나는) 전체시의 구조를 준다. 그것은 곧 던의 화자가 이런 기독교 달력에서 중심적인 사건의 관찰과는 멀어져 잘못된 방향에서 타고가고 있음이 확실하게 된다. 역설적으로 던의 화자는 이것이 잘못된 방향임을 주장하지만 그는 기도시의 예배에 적절한 기념의 행동을 실행한다. 십자가에 못박힘이 시의 화자에 눈보다 오히려 기억으로 현존하여 만들어진다. 그 시는 개인의 욕망또는 의무와 그리스도의 못박힘, 특히 그것을 위해 기도식으로 제꺼두려고, 반대적인 의무사이의 긴장을 표현한다. 잘못된 길로 간다는 생각이 먼저는 우주론적으로 , 사람의 영혼을 구..(Sphere.. growne/ Subject to forraigne motion)움직이고자 하려는 것으로 묘사하는 시작의 비유에서 다른 단계로 작업되고 있으며 이와같이 ‘whirld세상은 정확한 과정에서 나오며 그다음 지리적으로 말하자면 화자는 동쪽으로 가는 대신 서쪽으로 향하고 있다. 두 개의 장치(conceits)는 발전된 말장난인 sun/son에서 함께 나온다.: 마치 구(shpere)의 지성이 해에의해 지배되어야하는 것처럼 지상에서 말을 탄이는 떠오르는 태양의 방향에서 동쪽으로 타고가야한다. 그곳은 교회의 제단과 예루살렘의 방향을 위한 예배적으로 올바른 방향이다. 던은 시작했지만 시 Res에서 sun/son에 바탕을 두고 더긴 비유를 하며 완성하지 않았다. 하지만 Goodf에서 떠오르는 해와 함께 그리스도와 평행하여 절제가 그를 한번더 두 행에서 기독교신앙의 중심적인 비밀을 불러내기위한 위트와 역설을 끌어낸다. 동쪽에서 그는 떠오르면서 지는 해를 바라봐야한다. 즉,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올리워짐으로 죽게되고 그는 그러므로 하나로 이어지는 무한한날을 정함으로써 독생자가 된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히는 광경은 가설에 근거한다. 시의 요점이 던의 화자가 그것을 바라보지않기 때문이다: 그는 잘못된 방향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며 그는 교회에 있지 않기 때문이며, 그는 문자그대로 이런 시간과 장소에서 고난의 사건을 목격할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자는 그가 상세하게 보지못하는 광경을 그려낸다. 그가 볼 수 없고 감히 보지못하는것의 부분은 성육신의 역설이다. 그것은 또한 Corona에서 집중되고 있으며 Corona에서처럼 그는 공간적 용어에서 역설을 드러낸다. ‘ Could I behold those hands which span the Poles, /... peircd with those holes? 그 질문은 ’Could I 는 단순히 결의에 찬 질문이 아니라 가능의 물음이다: 내가 이러한 것을 지금 숙고하는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그 질문은 생애에서가 아니라 not in this lifetime 던이 출애굽기 33: 20절을 말로 바꾸어 꽤 명확하게 만든다. : ‘Who sees Gods face, that is felfe life, must dye. 던의 종교시의 전형인 사람과 하나님사이를 마지막 대치로 진행하며 던의 화자는 그의 하나님의 얼굴로 향한 돌아섬을 미루고 동시에 시의 중심장치에서 깔끔한 비틀기를 행한다. 그는 등을 돌려서 결국 징계를 받으며 일단 하나님이 그의 욕망을 불태우고 신성한 이미지를 회복할때에만 그는 그의 얼굴을 돌릴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돌아섬은 미래가 될것이다. Goodf는 그러한 묵상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포함한다. : 기념되어져야하는 과거사건, 기억의 현재행위와 미래의 의.
Targoff에게, Goodf는 집단적이고 예배적 시가 아니다. : 그것이 기념되는 공유된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리도스도의 숭배자를 대표해서 말하고자 애쓰지 않는다. A.B Chambers 또한, 시는 서쪽으로 승마뿐만아니라 자아의 여행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와 예배의 충돌은 정확하게 던의 종교시의 형태를 던져주는 것이며 Goodf는 자아와 예배가 택할수 있는 다른 궤도에서 가장 진보된 예가 될수 있는 반면에 그의 성직안수식후 쓴 세편의 던의 찬송가에서 다시 논의되는 제목이다. 찬송가는 함축과 공적장르에 있으며 던의 찬송가는 포괄적인 분류에 들어가기에 문제가 없지 않다. 성 아우구스투스는 찬가를 하나님에 대한 찬양하는 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