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의 구토 독후감 2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과 교육
소설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주인공 앙트완느 로캉탱은 현재 폴 1세 암살을 주도했던 드 롤르봉 백작의 전기를 쓰는 역사가이다. 그는 항상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쓰고 ‘역부회관’이라는 카페에 가서 욕구를 채우는 일상을 되풀이 하고 있다. 그러나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날 그에게는 분명히 무엇인가 ‘일’이 일어났으며 그는 그것을 파헤치기 위해 일기에 그것을 쓴다. 바로 그 ‘일’이라는 것은 ‘구토’증이다.
이 책의 전반부는 주로 그가 느꼈던 ‘구토’에 대한 상세한 느낌과 관련된 일이 쓰여 있다. 미국문화의 영향 때문인 라는 재즈가 나오고 구토증을 느끼는 도중에서 주인공은 그 노래로 인해 행복을 느낀다. 구토는 노란 전등불에도 매달려 있고 어느 곳에나 있어 느낄 수 있다. 그가 도서관에 갈 때면 항상 만나곤 하는 독학자는 그를 매우 존경하지만 그는 그에게 형식적으로 대할 뿐이다. 그는 독학자가 그의 여행사진을 보면서 모험을 많이 했느냐고 질문하자 그 상투적인 질문으로 인해 ‘관념’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모험이라는 관념은 말의 문제에 불과하고단지 ‘나에게 생겨난’ 것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가 한때 매우 열정적으로 매달렸던 드 롤르봉에 대해 속아 넘어 갔다고 말하며 그만은 나에게 진실을 말해 주리라고 믿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하고 있다. 그러다가 그는 자신의 과거 사랑했던 여인인 안니의 편지를 받는다. 그들은 4년 전에 헤어졌는데 아무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편지에 파리에서 꼭 만나야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 즈음에 독학자가 그에게 식사대접을 한다며 그를 방문하겠다고 한다. 그 후 그는 드 롤르봉백작의 연구에 대해 회의를 품고 “드 롤르봉씨는 나의 협력자였다. 그는 존재하기 위해 나를 필요로 했으며, 나는 나의 존재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 그가 필요했었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자신을 온 몸으로 느끼고 지금까지 자신의 주관 없이 살아왔던 일상과 남의 인생을 연구함으로써 삶의 존재를 확인하려 했던 어리석음을 깨닫는다.
자신을 찾은 후 독학자가 약속했던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찾아온다. 독학자는 주인공에 반해 자신의 주체적인 사고 없이 도서관에 있는 책을 저자의 알파벳순서롤 읽어대는 사람이다. 그와 마주 앉아 식사를 하면서 그가 존재하는 데는 아무 이유가 없다고 말하자 독학자는 그에게 반박을 하면서 자신의 휴머니즘을 강력히 설파한다. 주인공이 그것에 화가 나서 우리의 곁에 앉은 젊은 남녀를 사랑하느냐고 묻자 독학자는 그들의 젊음을 사랑한다고 하고 주인공은 그것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상징하고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며 구토를 느끼면서 자리를 뜬다. 책을 쓰는 일을 그만두기로 한다. 안니를 만나는데 사르트르는 안니를 주체적인 존재로 묘사하는 것 같다. 안니를 만나고 독학자에게 했던 행동이 마음에 걸려 도서관에 갔는데 독학자는 중학생 남자아이들을 성추행 하여 그 도서관에서 쫓겨난다. 주인공은 재즈를 들으며 다시 책을 쓰지 않겠다고 결심하고는 부빌을 떠난다.
실존주의자들은 소설을 수단으로 하여 자신의 철학을 논하였다고 한다. 이것도 그런 책의 하나이다. 그는 끊임없이 ‘구토를 등장시켜 그 ’구토‘의 의미를 파헤치고 결국은 그것으로 존재론을 설명한다.
“내가 갈망하고 있는 저 무(無)로부터 나 자신을 끄집어내는 것이 바로 나, ‘나’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증오, 싫증, 그것이 ‘나로 하여금 존재시키는’ 방법이며, 존재 속에 나를 밀어넣는 방법인 것이다.” 이 때 바로 이 ‘증오’와 ‘싫증’ 이 ‘구토’인 것 같다. 구토의 실체는 ‘나 자신’ 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의 명언인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에 대한 예도 책에서 찾아볼 수 있었는데 “의자를 만드는 사람들은 가죽과 용수철과 천을 가져다가 관념을 품고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일이 끝나서 걸상이 완성되었을 때, 그들이 만든 것은 ‘이것’이었다.”라고 하였다. 즉 의자는 인간이 생각하는 본질에 의해 만들어지므로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 근데 인간은 너무나 불완전하다. 로캉탱처럼 매순간의 일에 기뻐하고 증오하고 구토를 느끼는 불완전한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자신에 대한 완벽한 관념은 없다. 또한 본질도 없으며 단지 그 순간의 인간이 있을 뿐이다.
그는 존재는 필연이 아니라고 한다. 즉 인간의 존재는 현세에 던져진 우연이라고 하며 이 우연적인 실존적 인간은 따라서 주체적인 결단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하며 한시라도 남의 생각에 편승하거나 그냥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 증오하고 싫증내고 부정적이고 충격적이고 급박한 사건이라도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러한 사르트르의 소설은 내가 2장에서 배웠던 실존주의 철학과 교육에 잘 부합되는 내용인 것 같다. 즉, 실존주의에서는 인간의 자유와 주체성, 자아실현을 강조하는 교육을 주장하는데 바로 소설의 줄거리 자체가 주인공이 자신이 실존함을 깨닫고 주체적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주인공의 직업이 역사가이고 그가 사랑했던 여인이 연극을 했었다는 것도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실존주의에서는 인간의 자아실현을 돕는 역사나 철학, 예술교과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단지 역사적 지식을 통한 보편적 법칙성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에 의미 있는 선택을 중시하는 데 바로 주인공이 주체성을 깨닫기 전에 하던 일이 단순한 역사적 고증이었던 점과 연결되어 사르트르의 생각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역사사실자체보다는 그것이 인간에게 주는 의미를 더 중요시하고 연극이나 재즈와 같은 예술과목을 강조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주체적 결단을 중시하는 만큼 교사의 역할은 그리 주도적이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소설에서 이러한 실존을 깨닫게 되는 것은 누구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아닌, 장기간의 훈련의 결과도 아닌 어느 순간 문득 어떤 ‘사건’으로 깨닫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사는 이러한 학생의 어느 순간 갑자기 올지 모르는 나 자신에 대한 깨달음을 위해 학생을 돕거나 사건을 제공하는 역할이어야 할 것 같다.
실존주의 철학의 교육에는 분명 설득력이 있으며 매력도 있다. 인간은 특히 청소년기의 학생들은 자아실현에 대한 무거운 짐을 가지고 있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방황한다. 그러나 긴 방황에도 불구하고 자아실현은 어느 한 순간 충격적으로 이루어지는 때도 있다. 또한 자신이 존경할 수 있는 누군가와의 만남을 통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또 역설적으로 세상에 대한 끝없는 염증의 기간은 새로운 발전의 바탕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에는 실존주의의 어떤 배경을 이루고 있는 허무주의가 짙게 느껴진다. 일상을 거부하고 경멸하며 또 이러한 경멸과 증오를 바탕으로 자신을 깨닫게 된다는 주장은 왠지 나에게 어렵게 느껴진다. 긍정적인 자기는 결코 부정적인 사건으로 인해 그것도 한순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것은 교육의 역할을 거의 인정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아무것도 가치는 없고 다만 그 존재가 있을 뿐이라면 우리가 교육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교육의 무의식적인 힘일 것이다. 어느 순간의 사건으로 끝없는 사색을 통하여 어떤 깨달음을 얻는 것에는 그동안 계속되어온 교육이 바탕이 되어있어야 한다. 무엇인가 느끼는 순간을 위해서는 지금은 여느 때와 다르다는 지각능력과 함께 주의집중 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고 사색할 수 있는 능력은 비판적 사고능력을 포함하여 많은 능력을 요구한다. 이것은 교육으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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