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가지 윤리와 자유의지에 따른 개인의 책임과 의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자는 사회복음주의 윤리와 타인을 위해 현실 속에 산 예수를 따라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위해 사는 자기희생을 통해 이웃의 필요를 돌아보는 제자도의 윤리,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적 계명에 입각한,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적인 마음과 행동이 도덕적 삶이라는 점을 부각시킨 사랑의 윤리.
이 세 가지 윤리에 근거하여,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돌보는 것에 대한 며느리의 불만과 부담으로 어쩔 수 없이 요양원으로 옯겨진) 치매에 걸려 길을 잃은 노모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자기 집으로 데려온 여인.
A씨는 노모의 아들로써, 아내조차 부담스러워 한 노모를 성심성의껏 모시는 여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특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기독교 윤리학의 핵심인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여인에게 감복한 A씨.
그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에 여인과 가까워졌다. 이 상황을 상황윤리로 판단한다면, 모든 상황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단 하나, 사랑으로써 전혀 문제되지 않을뿐더러 윤리적이다.
A씨는 노모를 다시 요양병원에 모시려 했지만, 노모는 자신을 ‘사랑’으로써 대한 여인을 자신의 딸로 여기고 같이 살겠다고 버텼다. 또한 여인과 딸 역시 간곡하게 요청하여 A씨는 노모와 여인의 뜻에 따라 그 곳에 노모를 두기로 했다. 구티에레츠가 주목한, 소외되고 착취당하며 천대받는 소외계층을 억압된 상황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것이야말로 기독교 구원을 이 땅에 실현하는 사업, 즉 해방의 윤리를 A씨가 행하였다. 즉, 치매에 걸린 노모를 구원한 것이다. 소외되고 천대받던 집에서 요양병원으로 간 것은 A씨 아내의 냉대에서 해방된 것이기는 하나, 요양병원에서 살아가는 노인들은 모두 어느 정도 개인과 사회 내에서 많은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따라서 A씨가 노모를 여인의 집에 모시기로 결정한 것은 노모의 좋지 않은 상황에서 벗어나 사랑과 정성이 가득한 환경에 머물게 하는 것이므로 해방의 윤리를 실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A씨는 집이나 요양병원에서와는 달리 사랑받는 노모를 보며 안도하였고 매주 들러 노모를 문안하면서 기쁨과 사랑으로 노모를 부양하는 여인의 가족의 생계를 돌보아주었다. 이로써 며느리임에도 불구하고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부양하는데 힘겨움을 느껴 노모를 요양병원으로 보내게 된 결정적인 인물인 A씨의 아내도 마음속에 죄책감을 덜게 되었고 A씨도 마음의 평정을 이루어 만족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윤리적 문제의 배경이 되었다. 여인의 노모에 대한 극진한 애정으로 감동한 A씨는 심리적경제적 부담을 감소시키기 위해 자기 남편의 어머니인 노모(시어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보내라고 한 아내와 노모를 친어머니라 생각하고 사랑한 혈연관계도 아닌 완전 남인 여인을 비교하게 되었다. A씨와 아내는 바로 상대적 가치 우선순위로 인해 의견이 엇갈린 것이다. 아내는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심리적 부담(스트레스)와 경제적 가치를 우선순위로 꼽는 반면에 A씨는 노모에 대한 ‘효’가 경제적 가치 등보다도 우선한다고 생각함으로, 이 차이로 인해 A씨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여인에게로 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두 살림을 차림으로써 가장으로써의 책임과 의무를 무시하였다. 즉, 절제를 하지 못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이란 지식의 결핍이 아니라, 도덕적 행동을 행할 능력의 결핍에 있다. 이처럼 인간이 도덕적 행동을 행할 능력이 없는 이유는 원죄, 즉 인간이 본성으로부터 부여받은 죄성 때문인 것이다. 결국 원죄의 결과로 인해 선을 행해야 한다는 인간의 의지가 부족하게 되어 바른 행동을 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고, 인간의 성을 더럽고 추악한 것으로 규정하여 금욕주의적 성윤리를 주창하였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에서 A씨의 행위를 판단한다면, A씨는 도덕적 행위 실천 의지의 결핍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성윤리를 따르지 않았으므로 그른 행위이다.
인간의 진정한 도덕적 삶을 위해서는 믿음, 소망, 사랑이 필요하다고 말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에 의해 A씨는 신법과 인간법을 지키지 못하였고 아내가 노모를 다시 받아들일 것이라는, 또는 자신이 아내를 잘 설득한다면 아내와 자식과 노모와 함께 계속 충만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소망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사랑해서 결혼했고 자신의 자식을 낳아준 아내와의 사랑을 망각해버리고 말았기에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으로 A씨의 행동을 잘못된 행위라고 명백하게 판단내릴 수 있다.
종교개혁자는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지 않았고 불완전하고 타락한 것이 이성이라고 주장하면서 ‘순종하는 믿음’을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면,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며, 예수께 의지함으로써 하나님이 용서하신다고 하였다. 따라서 A씨는 얼른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여 고백하고 하나님과 예수께 용서와 자비를 구해야 했었다.
A씨는 노모가 죽은 10년 후까지도 계속 두 살림을 유지하였다. 여기서 A씨가 어느 정도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기독교현실주의에서 선은 사회적으로 보편타당한 현실적 법칙의 정의실현, 즉 사회윤리이고, 악은 개인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개인윤리, 즉 사랑의 윤리라 규명했다. 다시 말해서, 사랑만을 강조하는 평화주의는 죄의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니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통해 현실을 올바로 직시하고 그 현실 속에서 기독교인이 할 수 있는 역량과 최선을 다하며 인간의 실존적 상황-인간은 사회적 존재임-을 무시하지 않고 사회적 제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기독교적 통찰력을 극대화 할 것을 제시하였다. 사회를 비도덕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사회 제도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사회정의를 견고하게 하려 한 니버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A씨 개인의 윤리(사랑의 실천)는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나 사회적 윤리를 이루지 못했다. 엄밀한 기독교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A씨의 행위는 책임과 의무가 무시된 감성적이고 상대적인 사랑을 하였기에 A씨의 행위는 ‘악’이다.
칼 바르트는 윤리의 중심을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선이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의미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그 명령을 거스를 것인가라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 때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선의 행위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명령은 매순간 인간에게 어떤 결단을 요구하게 되고, 그 요구에 순종할 때 윤리는 실현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명령으로서의 윤리이다. 이 경우, 노모가 죽은 후에도 10년이나 두 살림을 지속해온 A씨의 행위는 자신의 양심을 외면하였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한 것이 명백하다. 이러한 점에서 미루어볼 때, A씨의 행위는 비윤리적 행위이다.
A씨는 사랑의 윤리와 상대주의적 입장(상대적 가치)의 윤리를 통해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였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행위는 옳았을지 모르나, 가장으로서의 행위는 옳지 못하였다.
기독교인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로서 행동하고자 노력해야 하며,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을 선의 실현으로 이해한 코람데오의 정신과 성경과 인간의 양심으로 대표되는 계시를 속였다. 또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속성을 온전히 닮으려 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였다.
끊임없이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순백의 상태로 유지해야 하는 기독교 윤리에 입각해서 A씨의 행위는 비윤리적인 행동이다.
나는 이 사례를 통해, 자유의지에 따른 개인의 책임과 의무를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고, 인간의 양심, 즉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감추려하고 속이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역시 깨달았다. 기독교 윤리 안에서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와 선과 악의 개념 등을 이번 사례의 주인공인 A씨의 행위에 대한 윤리적 판단에 적용하면서 각각의 제이론들의 효용과 한계, 문제점과 의의를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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