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대이갑제도의전개와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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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명대 이갑제도의 전개와 붕괴
≪목차≫
1. 이갑제의 배경
2. 이갑제의 정의
3. 이갑제의 붕괴
1. 이갑제의 배경
태조 주원장이 명 왕조를 새우고 황제에 등극하면서 명 왕조는 성립되었다. 태조는 건국과 동시에 어려움에 직면했는데, 원 조 말기에 가혹한 수탈과 전란으로 인해 피폐해진 농촌의 부흥과 농민의 생활안정이 가장 큰 문제였다. 태조는 이에 대한 첫 작업으로 유망한 농민을 향리로 돌려보냄과 동시에 인구가 많고 토지가 부족한 지방의 농민을 토지가 많은 곳으로 이주시켜 적극적으로 황무지를 개간토록 하였다. 이 덕분에 1387년의 경지면적은 850만 경으로 개국 초에 비해 5배 가까이 증가했다. 또한 적극적인 농업 장려책으로 조세를 감면하고 부업을 장려했으며, 대규모 수리사업도 펼쳤다.
이와 같은 농업정책은 농민생활을 안정시키는 데 필요한 조처였지만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재정기반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따라서, 명은 이런 목적을 원활하게 달성하기 위해 농민을 하나하나 확실하게 국가의 통제 아래 묶어둘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전국적인 토지 측량과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요컨대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수행해야 했던 사업이었고, 이를 위해 이갑제라는 향촌조직이 편성되었던 것이다.
2. 이갑제의 정의
이갑제는 중앙의 행정명령을 농촌사회에 침투시키고 세역의 효율적인 징수 및 촌락공동체의 향촌질서를 유지할 목적으로 시행하였다. 부역황책이 처음 작성된 1381년 정월에 시작되었는데, 기존의 촌락공동체 질서를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고 세역의무가 있는 110호를 1리로 편성하였다. 이 중 자급자족이 가능한 110호를 1里로 편성하고, 인정 수와 자산의 등급에 따라 호등을 구분하였다.
이 110호 가운데 인정(人丁)과 재산이 많은 10호를 이장호로 하고 나머지 100호를 갑수호로 하여 전체를 10갑으로 나누어 10호를 배속하여 매년 이장 ·1명과 각 갑에서 차출된 10명의 갑수가 돌아가면서 향촌의 여러 직무를 맡도록 했다. 이들이 수행하는 직무는 부역황책 작성과 부역 징수를 비롯해서 치안질서유지, 재판, 교화, 권농 등 향촌공동체 유지를 위한 제반 기능을 포괄했다.
또한, 각 리에는 덕망이 있고 나이가 지긋한 이노인을 두어 이민의 재판과 교화, 여론의 대변 그리고 향리의 질서유지와 상호부조를 지도하도록 하였다. 이밖에 화남의 일부지역에는 양장과 당장을 두었다. 양장은 몇 개 혹은 수십개의 리를 통솔하도록 하였고, 당장은 주로 수리시설의 책임을 맡겼다. 이들 이장, 이노인, 양장, 당장은 대부분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계층으로서 전통적 향촌의 관습적 지배자이기도 했다. 이들에게 국가 권력을 위임하여 향촌을 지배하도록 하였고, 그 대가로 여러 가지 역을 맡기게 되면서 실질적인 향리의 지배자로 삼았다.
이처럼 이갑제는 향촌의 현실적 계층관계 및 신분관계를 기반으로 공동체적인 여러 생산기능에까지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명대 사회의 전 구조에 걸친 통일적 지배체제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3. 이갑제의 붕괴
명 초기에는 부역 부담이 비교적 가볍고, 또 국가의 적극적인 권농 및 향촌교화정책의 추진으로 이갑체제하에서는 어느 정도 안정된 사회를 이룰 수 있었다. 그렇지만 명 초기부터 현실적으로 지주·전호의 생산관계 관행이 엄존해 있었고, 대토지 소유의 진전으로 인한 사회의 계층분화가 심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작농을 기반으로 균분균역 이념을 표방한 이갑제는 내재적인 모순을 서서히 드러내게 되었다. 특히 사회분화현상은 사회변화와 발전 속도에 따라 확대 될 수밖에 없었으며, 중기에 들어서면서 더욱 심화 또는 가속화되었고 사회 여러 부분에 걸쳐 동시 병렬적으로 일어남으로써 이갑질서는 점차 붕괴되어 갔다.
이갑제의 임무 가운데 특히 중요했던 것이 부역징수라는 것인데 명조의 재정규모가 계속 커져감에 따라 명초에 비교적 가벼웠던 부역이 점차 증가하여 농민의 부담이 갈수록 무거워지고, 상품생산 및 화폐경제의 진전으로 인해 빈부격차가 확대되어가는 상황에서 세역의 은납화는 상업적 대지주의 땅을 경작하던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뿐만 아니라 이갑 구성원들 간의 불균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노인의 임무였던 예비창의 관리 및 비축 곡식의 진급(賑給)은 물론이고, 향촌내의 재판을 행하기 위해 각 촌락에 세워진 신명·정선정도 이 무렵에 모두 쇠퇴하여 없어지게 되었고, 이노인의 민간에 대한 재판 및 권농에 대한 가르침과 훈계도 제대로 행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