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맑스가 옳았다. 산업사회에서 가치란 투여된 노동시간에 비례해 나온다. 근면과 성실만이 가치를 창출한다는 이야기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가치는 분화된다. 물건의 사용가치와 그 물건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규정하는 교환가치, 즉 화폐로 나눠지는 것이다.
문제는 교환가치와 사용가치가 더 이상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치의 자본주의적 왜곡이다. 이는 곧바로 상품생산의 전 과정에서 노동자가 소외되는 인간소외현상으로 이어진다. 그뿐만 아니라 가치가 마치 자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착시현상이 일어난다는 게 맑스 가치론의 핵심내용이다.
노동의 기본철학만 본다면 마르크스 이론은 산업사회를 설명하는 가장 훌륭한 이론이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산업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동력은 쉬지 않고 일하는 노동뿐이다. 자본 축적을 위한 근면, 성실한 노동의 가치가 맑스의 가치론에서만큼 확실하고 분명하게 설명된 경우는 없다. 과연 그런가.
2. 펼치며
‘노동에 따른 가치생산’(가치법칙)과 ‘투하자본에 따른 가치취득’(평균이윤율)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평균이윤(율)의 정립에 따른 가치법칙의 은폐는 실제적인 것으로서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특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생산물의 가치에는 자본가가 비용을 들이지 않은 가치, 즉 노동자가 비용을 들인 가치가 들어 있고 이것이 잉여가치이다. 하지만 자본가는 자신이 비용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비용가격에서 제한다. 여기서 상품의 자본가적 비용가격과 상품의 가치, 즉 실제적 비용가격 사이의 괴리가 발생한다.
자본가의 시선에는 노동력의 가치인 ‘임금’이 노동의 가치(또는 가격)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실제로는 총노동시간(노동시간 전체)과 노동력의 가치(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 사이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잉여가치의 원천이 미궁에 빠진다.
가치생산과정에서 불변자본의 경우 그 일부만이 가담하는데 노동과정에는 불변자본 전체가 소재적으로 가담한다. 그래서 비용가격의 형성에서는 불변자본의 일부만이 가담하지만 잉여가치 생산에는 불변자본 전체가 가변자본 전체와 더불어 함께 기여하는 듯한 환상이 발생한다. 이렇게 잉여가치가 총투하자본의 산물이라고 생각될 때 잉여가치는 이윤이라는 환상적 형태를 취한다.
자본주의적 경쟁의 가능성은 상품의 가치와 비용가격 사이의 차이(잉여가치 크기)에서 주어진다. 이 차이 한도 내에서는 자본가는 상품을 그 가치 이하로 판매하면서도 이윤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윤은 잉여가치의 자본주의적 재생산과정에서의 현상형태이다. 잉여가치에서는 노동과 자본의 관계가 나타남에 반해 이윤에는 자본(비용가격) 대 자본(이윤)의 관계가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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