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원의 이해
1) 평등원이란?(뵤도인)
평등원은 일본 교토 부 우지 시에 있는 불교 사원이다. 헤이안 시대 후기 11세기의 건축, 불상, 회화, 정원등을 오늘 날 까지 전하여 고도 교토의 문화재의 일부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17세기 이래 정토종과 천태종을 겸했고 현재는 특정 종파에 속하지 않는 독립된 불교 사원이다. 덧붙여서 일본의 10엔 동전에는 평등원 봉황당이, 10000만 지폐에는 봉황당의 지붕 상에 장식되어 있는 봉황이 디자인 되어 있다.
2) 기원과 배경
1.기원
교토 남교의 우지의 땅은 겐지 모노가타리의 우지 10첩의 헤이안 시대 초기부터 귀족의 병장이 영위되고 있었다. 현재의 평등원의 땅은, 9세기 말 무렵 히카루 겐지의 모델이라고 말하는 태정관의 장관 미나모토노 도오루가 영위한 별장 이었던 물건이 우다 천황에 건너, 청황의 손자인 근원 시게노부를 거쳐 관백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별장 우전이 된 것이다. 이것이고 후에 요리무치가 1052년에 이 별장을 희사하여 1053년 불당이 준공되었는데, 그것이 평등원 봉황당이다.
2.배경
평등원이 만들어진 시기는 헤이안 시대로 중기에 만들어진다. 헤이안 시대의 문화는 10세기 이후 크게 변화한다. 헤이안 시대 초기의 문화는 주로 중국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문화였다. 하지만 894년 견당사의 파견을 중지하려는 건의와 더불어, 일본적인 색채가 강하게 나타나게된다. 일본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총력을 다해 모방하려 했던 당나라의 문화 모델에서 벗어나, 당의 문화를 자체적으로 소화하고 동화시켜 일본적인 문화를 모색하려는 시기가 시작된다. 10세기 이후 12세기 무렵의 헤이안 중기의 이런 문화 경향을 국풍 문화 혹은 후지와라 문화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7세기 경 일본에 전해진 정토신앙이 10세기 경부터 빠르게 확산되었다. 정토 신앙은 염불로 아미타여래가 있는 서방 정토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10세기 전반 구야라는 인물이 민중이 모이는 시장에서 염불을 보급함으로써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구야는 일본 정토교의 시조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그는 거리를 유랑하며 길에 쓰러져 죽은 사람을 보면 화장한 뒤 정성껏 장례를 치러 주었다고 한다. 그는 민중들 사이에서 민중에게 염불을 권하고, 민중을 위한 이타행을 행하는 수행자로 살았다. 10세기 후반 겐신이 를 지어 정토교 이론과 수행을 체계화했다. 그는 저오 사상을 깊이 연구하고, 중국의 학승과 서신을 주고 받는 교류를 통해 가르침을 얻었다고 한다. 그의 에 묘사된 생생한 지옥의 모습은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정토교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정토 신앙이 확산되면서, 정토 사상과 더불어 정토 세계로 인도하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아미타당이 세워지면서 정토 미술도 꽃피게 된다.
헤이안 중기는 정토교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당시 귀족들은 아미타불을 여물하고 정토 세상에 왕생할 것을 바라며, 서방 정토를 구현한 불당을 세우기 시작했다.
3) 후지와라씨 가문은??
하급귀족 출신인 나카토미노 가마타리는 훗날 다이카 개신으로 불리는 소가 씨족의 정벌을 주도한 공으로 668년 덴지 천황에게서 후지와라노 아손(藤原朝臣)이라는 호칭을 받았다. 그의 차남이자 후계자인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천황의 외척이자 중신으로 활약하였다. 후히토의 딸인 미야코가 문무 천황의 후궁이 되어 쇼무 천황을 낳았고, 또다른 딸인 교묘시를 그의 황후로 삼게 했다. 이것은 황가 출신만이 황후가 될 수 있다는 전례를 깬 최초의 사례였다.
4) 경내
① 봉황당(鳳凰堂)
일본의 10엔 동전으로도 채택되어있는 봉황당은 당 좌우에 회랑을 붙여 지은 모양이 봉황이 나래를 편 모습을 닮았다고 봉황당이라고 한다. 또한 「봉황당」의 호칭은 에도시대부터로,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어 「 아미다도 」혹은 간단히 「 미도 」이라고 불리고 있다.
1053년 세워진 봉황당은 본존 아미타 여래상을 안치하는 중당과 좌우 날개(익랑과 미랑)이 이 주건축물로 「평등원봉황당」으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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