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클레이토스와 스토아 철학
헤라클레이토스는 존재의 전체에서 영속적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봤다. 그는 자연의 기본 특성을 지속적인 변화라고 생각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은 흐른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운동 가운데에 있으며 어떤 것도 영원히 존속하지 않는다. 만물은 흐르고, 변화하고, 진행하고, 다른 무엇이 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은 다른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 강물에 비유를 들자면,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물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두 번째로 내가 강물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아까와 같은 바로 그 물이 아니다. 이미 두 번째에선 강물도 나도 처음과는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은 현대 상담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누구도 동일한 자아를 두 번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나는 어떤 순수한 본질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불변의존재가 아니라 다양하게 변화하는 것이다. 나는 의미, 방향에 따라 변하고 맥락과 환경에 다라 가치를 갖는다. 이러한 것들 또한 역시 변한다. 세계와 자아 사이의 경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한 상호관계 하는 과정안의 움직이는 것이다. 나는 친숙한 주변과 혼합되어있으며 단지 그것들 안에 존재하지 않고 그들에 속해서 존재한다. 그것들은 자아를 형성하고 포함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은 자기 자신을 찾는 치료법이 실제로 의미할 수 있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불확실성들을 제기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확실하고 고정된 견고한 자아를 진정으로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은 문제가 있다.
반면에 스토아철학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세계 속에서 규정되어 있는 결정론적인 존재이다. 스토아주의는 질병과 죽음과 같은 모든 자연 진행 과정이 변치 않는 자연 법칙을 따른다고 말했다. 때문에 스토아학파는 결정론적 세계관을 주장했는데, 이는 세상의 모든 것은 태어나고 죽을 때까지 모든 게 결정돼 있다는 것이다. 스토아학파에서 사람들이 고통이나 괴로움 등을 느끼는 이유는 자신의 운명, 즉 자신에게 정해진 것 이상을 얻으려고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내가 누릴 수 있는 부분은 정해져있는데,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하면 그것 때문에 괴로워진다는 것이다. 스토아학파는 자신의 운명, 자신에게 주어진 부분만큼 인정을 하고 살아간다면 사람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자신에게 정해진 운명만큼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을 얻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세계는 지속적인 여러 대립 쌍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우리가 아파 보지 않고는 건강의 중요성을 잘 이해할 수 없다. 또 한 번도 굶주린 적이 없으면 배부름의 기쁨도 모를 테고, 전쟁이 없었다면 우리는 평화를 소중히 여길 줄 몰랐을 것이며, 겨울이 없다면 봄이 오는 것을 볼 수도 없다. 또한 헤라클레이토스는 “선뿐만 아니라 악도 전체를 이루는 총체성 속에서 필수적인 제자리를 차지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립 쌍 사이의 지속적인 교류가 없다면 이 세계는 이미 끝난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스토아학파는 선만이 유일한 최고의 덕이라고 보았고, 선에 반대되는 것은 악덕이라고 보았다. 선하다는 것은 최고의 것이며, 모든 이들이 추구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스토아의 관점에 따르면 우리가 순전히 즐거움만을 쫓는 인간이 되지 말아야 하고 덕을 삶의 유인과 지침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덕스러운 삶이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다. 이것은 이성에 따르는 삶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성에 따르는 삶을 헤라클레이토스도 중시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공통점을 지니기도 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신이란 낮과 밤이요, 겨울과 여름이며 전쟁과 평화, 배부름과 굶주림”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그가 쓰고 있는 ‘신’이라는 단어는 물론 신화에 등장하는 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가 말하고자 한 신 또는 신적인 것은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어떤 것이다. 그에게 신은 바로 그 자체 내부에서 부단히 변하는 모순에 가득 찬 자연이다. ‘신’이라는 단어 대신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라는 그리스어를 자주 썼다. 이 말은 이성을 뜻한다. 그는 자연의 모든 현상을 조종하는 세계이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우리 인간이 늘 같은 생각을 하거나 똑같은 이성을 가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 이성 또는 세계 법칙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것이며, 모든 인간은 이 세계 이성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람들이 대개 자신의 개인적 이성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자연이 보여 주는 모든 변화와 대립에도 불구하고 헤라클레이토스는 통일과 전체성을 보았던 것이다. 그는 만물의 바탕에 놓여있는 이 어떤 것을 신 또는 로고스라고 불렀다.
또한 이들의 공통점은 헤라클레이토스처럼 스토아 학자들도 모든 사람이 동일한 세계 이성에 혹은 동일한 로고스에 관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스토아학파는 개인을 축소 형태의 세계로, 즉 ‘대우주’에 대응하는 ‘소우주’로 간주하였다. 스토아 학자들은 개인과 우주의 차이를 없애듯이 정신과 질료의 대립도 부인하고 오로지 하나의 자연만 존재한다는 일원론에 동조했다.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는 정념이나 외계의 자극에 흔들리지 않는 초연한 마음의 경지인 아파테이아를 주장했다. 스토아학파가 추구하는 이 아파테이아의 상태는 세계이성의 계획을 파악한 상태다. 스토아주의가 중시했던 핵심적인 개념은 의무이다. 참된 스토아 철학자란 근본적인 도덕적 원리와의 조화로운 삶으로부터 평정상태가 나타난다는 지식으로 의무를 지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의무들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활동적이고, 책임감을 가지고 의무들을 어깨에 짊어짐으로서 우리 자신을 표현하고 개발시킨다. 스토아 관점은 올바른 것에 필연적으로 보상이 따르기 때문이 아니라 올바른 것이 옳기 때문에 우리는 옳은 일을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세계를 우리의 계획과 융합시키려고 애쓰기보다 계획들이 우리의 상황에 맞도록 그것을 수정할 필요가 있음을 스토아철학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헤라클레이토스와 스토아주의는 철학 상담에 있어서 어떤 의의를 지니고 있을까? 먼저 헤라클레이토스에 따르면 상담자처럼 낯선 사람과의 만남에서 자아가 잘 탐구되고 발전될 수 있느냐는 물음이 제기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한 사람의 진실 된 자아는 그들이 소유한 삶의 흐름과 그들에게 관련된 환경을 제외하고는 알 수 없다고 봤다. 삶의 맥락에 대한 지식은 내담자의 내적인 의식의 흐름을 통한 사적인 고백으로부터 얻어지는 지식만큼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상담자는 내담자의 일상 환경에 실제로 참여하지 않는다. 항상 치료는 상담실에 한정되어진다. 때문에 내담자를 위해 그들은 내담자의 입장에서 그들과 함께하고, 내담자와 공감하고, 함께 느끼도록 노력해야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상담사는 절대로 이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관여해서는 안 된다. 상담사는 절대로 내담자의 실존의 개별성을 직접적으로 형성하거나 형성되게 허락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단지 내담자가 스스로 깨닫고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반면, 스토아주의는 우리에게 어떤 철학 상담적 의의를 지닐까? 스토아주의에 따르면 우리의 불안은 사건 그 자체 보다는 우리의 반응과 기대에 따라 좌우된다. 일어난 사건에 대한 정서적 반응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이는 어떤 하나의 사태가 아니다. 이는 사태 자체에 대한 인지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 달라지는 것이다. 때문에 스토아주의에 따르면 사유를 통한 이러한 감정적 반응 때문에 우리가 괴로워지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사유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 우리는 이성적으로 해석하는 안목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태에 대한 두려움은 훈련이 덜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신적 성숙을 위한 훈련과 자기 수양을 통한 발전이 필요하다. 스토아주의는 세계를 바꾸기 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바꾸라고 말한다. 스토아철학은 자기반성, 의무, 도덕성, 자기절제와 같은 것들을 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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