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목회자의 윤리
목사는 안수 받고 짐을 등에 지고 교회공동체를 돌아보아야할 것이 기대되는 흥미로운 인물들이다. 그래서 목사의 도덕성에 관해서 생각해 본다하면 그들의 소명에서부터 시작해야한다. 먼저 목사는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일하는 사람인지 알기 전 까지 목사가 반드시 행하여야 할 윤리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목사란 회중들 앞에서 말씀과 성례에서 신앙을 체현해야 하는 특별한 섬김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기독교인이다. 목사는 그들의 소명에 내재한 무거운 부담 때문에 분노할 지도 모르지만 모든 안수 예문이 벧전5:3절 말씀을 인용하여 말하는 것처럼 “양 때들의 모범”이 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피할 길이 없다. 목회서신은 장로들과 집사들과 과부들에게 바른 가르침과 바른 행동 사이의 일치를 거듭 강조한다. 목사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가르치는 것과 설교하는 것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흥미롭게 설교하는 소리를 들었고 또 얼마나 소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았는가. 설교에서는 미개와 결례와 허위에 대하여 가장 참을 수 없는 듯 보이던 사람들이 삶이나 대화에서는 그러한 일들을 쉽게 용납하는 듯하다. 우리는 훌륭하게 설교하는 방법만큼 훌륭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도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는 충고하였다.
흔히 어느 목사가 공공연한 죄를 범하면 주변 사람들은 목사도 인간일 뿐이라고 말하여 목사의 실책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말을 묘하게 오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목회자의 소명을 격하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세례 받은 사람이 다 그런 것처럼 목사는 인간이상의 존재가 되도록 부름 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성직자의 윤리 또한 기독교 윤리의 유일무이한 특이성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이전에 이스라엘처럼 교회는 만국의 빛이 되는 특유한 사명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 되는 길을 세상에 보여주라고 부름 받았다. 월터 부르거만은 이스라엘 특유한 사명은 특유한 윤리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이 잘 알고 있었다고 하였다. 이스라엘은 독특한 자의식이 강한 신학적 이념적 관점을 실천하였다. 그 관점은 독특한 훈련에 뿌리를 두고 독특한 윤리적 결과로 표현되는 독특한 실천을 옹호하였다. 그것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독특한 정체를 유지하도록 하였고 그 자유로운 상상을 위한 공간을 보호해 주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의 독특한 관례적 윤리를 위한 공간을 확보해 주었다. “너희의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 (레19:2)
거룩하라고 명하시는 이 부름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해당된다. 그래서 터툴리안이 도덕적 비난을 퍼부었을 때 그는 도덕적 순결을 교회 회중의 지도자들에게만 적용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키프리안 때에 이르게 되면 안수 받은 성작자의 순결을 강조한 것은 성직자를 유일무이한 도덕적 모범 자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성직자의 행동은 목사의 삶이 교인들의 삶으로부터 성별된 것이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의 행동보다 훨씬 낫지 않으면 안 된다. 교인들을 돌보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은 청렴한 삶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긴요한지를 주의 깊게 생각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생각이 순수해야 하며 행동의 모범을 보이고 삼가 침묵을 지키며 언사에 유익해야 하고 가까운 이웃 모든 사람에게 동정을 베풀며 모든 사람들보다 더욱 숭고한 명상과 선한 삶을 사는 사람들과 겸손히 동행하며 죄인들의 사악함에 대항하여 의를 추구함에 바로 서서 열심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내적인 일을 염려하는 나머지 바깥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을 그릇되게 해서는 안 된다.
2. 인격
성직자를 위한 키프리안의 도덕적 교훈은 교회 초기의 문제가 있는 발전의 실례인데 즉 성직자는 결국 낮은 평신도위에 군림하는 일종 윤리적 상위 겉 딱지로 보게 되었다. 뒤에 루터는 카프리안의 도덕적 교훈이 성직자의 인격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목사라는 직임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것 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았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므로 심지어 불한당 같은 목사라 할지라도 성례적인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그 불쌍한 대리자를 통해서조차 목회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에 대한 우리의 비판에도 불구한고 우리는 여전히 목회소명의 본질이 소명의 요구에 걸 맞는 지도자의 인격형성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스탠리 하우어바스는 훌륭한 성경해석을 위해서 잘 형성된 인격이 필수적인 것이라는 아타나시우스의 강조를 거듭 인용하였다. 성경을 바로 이해하고 탐구 하기위하여 선한 생활과 영혼의 순수가 꼭 필요하며 인간 본성이 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하나님에 관한 진리 곧 말씀을 파악하도록 정신을 인도하는 기독교인의 미덕을 위해서도 그러하다. 어거스틴은 우리가 성경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동안 또한 너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눈을 가지고 보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한 사람의 인격이 큰 차이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모든 목회 활동에 대하여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필립 불룩스가 설교란 인격을 통하여 전달된 진리라고 정의한 것이 설득력이 있는 것은 복음을 실행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채 기술적으로 말만 하는 것은 거짓된 복음 선포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격이란 전염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즉 인품을 갖춘 현재 살아있는 사람이나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 모두에게 복종함으로서 인격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는 성자들과 그들의 행동을 본받을 것을 촉구하였다. 목회자의 교육이 단순한 어떤 기술습득 지식의 반복된 가르침이나 데이터와 아이디어 습득으로 격하되었을 때 목사 인격형성에 이롭지 못한 것이다. 목사라는 이름에 걸 맞는 모든 목회자 인격형성은 여러 행태의 견습으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그 목적이 한결같은 목회자의 인격형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 지도자가 모범적인 인격의 소유자여야 하고 그렇지 못할 때 교회지도자 직에서 그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고직식한 이상주의자가 된다든지, 아니면 목회자로부터 지나친 것을 요구하는 비현실적인 사람이 되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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