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사건 66주년을 맞아 다시 되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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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사건 66주년을 맞아 다시 되돌아보기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4.3사건 66주년을 맞아 다시 되돌아보기
오는 2014년 4월 3일로 올해 4.3사건이 66주년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올해도 매년마다 이뤄지는 각 종 여러 가지 위령제, 전시회 등 행사가 있었다. 그리고 행사 외에도 4.3을 기념하는 ‘제주 4.3 평화공원‘이 제주도에 위치해 있다. 이러한 행사와 기념관 등을 통해 4.3사건을 다시 한 번 되돌아 보려한다.
그렇다면 먼저 ‘제주 4.3사건’이란 무엇인가? ‘제주 4.3사건’은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으로, 일본 패망 후 한반도를 통치한 미군정에 의한 친일세력의 재등장과 남한 단독정부수립에 남조선노동당을 중심으로 반대하는 과정에서 많은 제주도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제주 4.3사건’에는 간접적인 배경과 직접적인 배경이 있다. 간접적인 배경은 예전에 제주도는 지리적 특성상 동북아 요충지였다. 그래서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일본군 6만이 주둔한 전략적 기지가 되었었다. 그리고 광복 후 일본군이 철수하고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 주민들이 귀환하였으나 이들은 직업을 구하지 못하여 생업을 영위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여기에 생필품 부족과 콜레라 발병으로 인한 수백 명의 인명 희생, 극심한 흉년 등이 겹친 데다가 일제에 부역한 경찰들이 미군정하에서 다시 치안을 책임지는 군정경찰로 변신하고, 군정 관리들이 사리를 채우는 부정행위를 일삼는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가 부각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직접적인 배경으로 1947년 3월 1일 제주읍 관덕정 마당에서 열린 3·1절 기념집회 중 기마경찰이 탄 말의 말굽에 구경을 나온 어린이가 치이는 일이 있었고 이를 본 주변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은 시위하는 군중에게 총을 발포하여 일반주민 6명이 사망하는 ‘3·1발포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로당 제주도당은 반경(反警) 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였고 그 결과 제주도내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경찰의 발포에 항의하여 3·10 총파업에 동참하였다. 전체 166개 기관단체 에서 41,211명이 참여하였고, 이중 제주출신 경찰관 66명도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미군정은 조사단을 제주도에 파견하여 진상조사에 나섰으나 경찰의 발포에 대한 과오를 다스리기 보다 남로당의 선동을 분쇄하는 데만 주력하여 제주도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를 전원 외지인으로 교체하고, 경찰과 우익단체인 서북청년회 단원들을 대거 동원하였다. 당시 작성된 미군 보고서에 따르면 제주도를 ‘붉은섬(Red lsland)’로 규정하고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에 동조자’라고 기술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일어난 4.3의 전개과정을 살펴보자면 당시 미군정에 의해 동원된 조병옥 경무부장을 중심으로 한 응원경찰과 신임 제주도 도지사 유해진의 호위병 역할을 하던 서북청년회 단원은 3·10 총파업 이후 이듬해 4·3사건이 발발하기 전까지 약 1년간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전개하였다. 작전 개시 후 이틀 만에 200명이 연행된 것을 시작으로 2,500여명이 구금되고 고문이 자행되었다.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은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에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내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였다. 이들은 경찰과 서북청년회의 무자비한 탄압을 중지하고, 남한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촉구하였다. 사태를 경찰력과 서북청년회의 힘으로 수습하지 못하고 상황이 더 악화되자 주한미군사령관과 군정장관은 경비대에 진압작전 출동명령을 내렸다. 경비대 제9연대장과 무장대 측 사이의 ‘4·28 협상’으로 경비대와 무장대는 한때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하는데 합의하기도 하였으나 우익청년단체가 일으킨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무산되었다. 방화사건 직후 김익렬 연대장은 현장 조사를 벌인 끝에 우익청년들의 소행임을 밝혀 냈지만 미군정은 이를 무시한 채 지상과 공중에서 방화 현장을 입체적으로 촬영하여 《제주도의 메이데이 May Day on Cheju-do》라는 기록영화를 만들고, 이 사건을 무장대의 소행으로 조작하는데 이용하였다. 오라리 방화사건 이틀 후인 5월 3일 미군정은 무장대에 대한 총공격을 경비대에 명령하였고 경찰 중심의 진압작전은 경비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미군정이 강경진압으로 선회한 것은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제주도 사태의 조기진압에 초점을 맞춘 주한미군사령관의 결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1948년 5월 10일의 남한 단독선거에서 제주도는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 되었고 다음달 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하려는 미군정의 시도도 수포로 돌아갔다. 재선거가 무산되자 미군정은 강경진압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5월 20일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하여 무장대에 가담하였고, 6월 18일 경비대 박진경 연대장이 부하 대원에게 암살당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이후 잠시 소강 상태에 놓였으나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다음달 9일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남한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문제를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그 해 10월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와 함께 본토의 군 병력을 증파하였고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에 앞서 9연대 연대장은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하였고, 중산간마을에 대대적 진압작전이 벌어졌다.
1948년 11월부터 중산간마을에 대한 강경진압으로 마을의 95% 이상이 불에 타 없어지고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로 인하여 삶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마을 주민 약 2만 명이 산으로 들어가 무장대의 일원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없는 경우에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하여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이른바 대살(代殺)을 자행하기도 하였으며, 재판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기도 하였다. 12월 말 진압부대가 9연대에서 함병선 연대장의 2연대로 교체 되었지만 강경진압은 계속되었다. 한 마을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400여명의 주민이 총살당한 ‘북촌사건’도 2연대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세화·성읍·남원 등의 마을에서는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주민들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1949년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함께 선무작전이 병행되었으며, 귀순하면 용서한다는 사면정책에 따라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적으로 치러진 데 이어 6월에 무장대 총책인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그리고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 검속되어 처형 당하였고,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 되었다. 이 사건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禁足) 지역이 전면 개방됨으로써 발발 이후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4.3사건은 여기까지만 되돌아보고 이제 4.3사건에 관련된 행사나 기념관, 유적지 등에 대해 알아보았다. 먼저 ‘제주 4.3 평화공원’에 먼저 다녀왔다. ‘제주 4.3 평화공원’은 4.3사건으로 인한 민간인학살과 제주도민의 처절한 삶을 기억하고 추념하며,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평화 / 인권기념공원이다.
< 제주 4.3평화공원 방문사진 >
‘제주 4.3평화공원’은 기념-추념 공간 / 아카이브 공간 / 역사교육-교훈의 공간 이렇게 3개의 공간으로 나뉘어있다. 여기서 기념-추념 공간은 해방공간의 제주도에서 자존을 위해 불의에 맞섰던 제주도민의 저항과 그에 뒤이은 처참한 살육의 역사를 기념하고 추모하는 공간이고, 아카이브 공간은 20세기 인류의 학살의 역사와 해방공간 한국현대사와 관련된 사료를 유기적이고 총체적으로 제공하는 공간이며, 역사교육-교훈의 공간은 어둡고 처참한 과거의 역사를 넘어 미래를 사는 후대들에게, 고난에 찬 삶의 교훈을 전달하는 역사교육의 공간이다. 여기서 ‘제주 4.3평화공원’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제주 4.3평화공원’은 현재 국내에서 유일하게 한국현대사를 전면적으로 다루는 기념관으로서, 이 분야의 연구자나 관심 있는 방문객들에게 해방 전후사의 인식을 깊게 하는 전문적 기능을 가짐으로 한국현대사 전문역사관으로서의 성격을 나타낸다. 또한 학살은 4.3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단면이다. 20세기 들어 인류의 제노사이드는 가장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4.3평화 기념관은 제주도민의 학살의 역사와 함께 세계의 주요한 제노사이드를 다루는 데에서는 제노사이드-과거사 청산의 역사관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그리고 4.3의 진상규명을 통한 화해와 상생을 염원하는 공간으로 4.3 평화 기념관은 4.3 체험세대들에게는 화해의 공간으로, 후세대들에게는 상생의 공간으로서 역사 교훈의 이정표 역할을 함으로써 화해와 상생의 공간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마지막으로 전시언어는 제주의 향토성과 문화 정체성에 기초한다. 제두모니의 역사가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한다면, 4.3의 현장은 제주도라는 지역성과 장소성 그리고 전래의 문화적 전통성과 자연환경의 풍토성 위에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4.3의 역사는 제주의 향토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측면에서는 향토적인 성격 또한 보인다.
4.3평화 기념관의 전시내용에 대해 말하자면 총 8개의 관이 있다. 제 1관에서는 프롤로그를 보여주고 제 2관에서는 해방과 좌절, 제 3관에서는 무장봉기와 분단 거부, 제 4관에서는 초토화와 학살, 제 5관에서는 후유증과 진상규명 운동, 제 6관에서는 에필로그를 보여주며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관이 나뉘어 있다. 이외에도 다랑쉬 특별전시관과 영상관, 해원의 폭낭이 있다. 이외에도 야외에는 비설(飛雪) , 위령탑 , 귀천(歸天) , 각명비 , 위패봉안소 , 추모승화광장 , 행방불명인 표석 , 4.3 유해봉안관등 여러 가지 4.3평화공원의 조성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다음으로 4.3에 관련된 유적지를 살펴보자면 대표적인 유적지로 ‘북촌 너븐숭이’를 예로들 수 있다.
< 북촌 너븐숭이 4.3 기념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