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기 이후의 백제와 왜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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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6세기 이후의 백제와 왜의 관계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6세기 이후의 백제와 왜의 관계
들어가며
그 동안 백제와 왜와의 관계를 보는 관점은 백제를 上國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주를 이루어왔다. ‘백제는 후진국 일본에 선진문화를 전파했다.’라는 국사 교과서의 논리는 그대로 학생들에게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고대 여러 자료나 정황을 바탕으로 할 때 백제와 왜의 관계를 상하관계로 파악하는 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특히 6세기 이후에는 삼국사기에 백제와 왜와의 교류 내용의 거의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백제의 대왜 관계를 규명하는데 어려움이 있어왔다. 본 발제문을 통해서 백제의 대 왜 관계 특히 6세기 이후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본론
- 6세기 야마토 정권과 백제와의 관계
507년에 시작되는 일본의 繼體朝의 시작과 繼體天皇의 등장은 일본 대내적으로는 천황가의 시작이자, 대외적으로는 한반도와의 관계가 긴밀해지는 시기이다. 일본서기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에 야마토 정부는 백제에 15회에 걸쳐 사자를 파견하거나 군원을 제공하였고 일본서기 繼體紀 3(509)년2월조, 繼體紀 6(512)년4월조, 繼體紀 9(513)년 2월조, 繼體紀 23(529)년 3월, 是月條, 宣化紀 2(537(년 10월조, 欽明紀 4(543)년 11월조, 欽明紀 6(545)년 3월조, 欽明紀 7(546)년 춘정월조, 欽明紀 9(548)년 6월조, 欽明紀 9(548) 10월조, 欽明紀 11(550)년 2월, 欽明紀 12(551)년 3월조 欽明紀 15(554)년 5월조, 欽明紀 17(556)년 춘정월조
, 반면에 백제는 24회에 걸쳐 선진문물을 제공하거나 사자를 파견한 것으로 되어 있다. 繼體紀 6(512)년 12월조 繼體紀 7(513)년 6월조, 繼體紀 10(516)년 5월 繼體紀 10년 9월조, 繼體紀,23년 3월조 安閑紀 원년 5월조 欽明紀 원년(540) 8월조, 欽明紀 2년 7월조,, 欽明紀 4년 9월조, 欽明紀 5년 3월조, 欽明紀 6년 5월조, 欽明紀 7년 6월조, 欽明紀 8년 4월조, 欽明紀 9년 4월조 欽明紀 11년 4월조, 欽明紀 11년 4월 을미조, 欽明紀 13년 5월 欽明紀 14년 10월조, 欽明紀 14년 춘정월조, 欽明紀 15년 2월조, 欽明紀 15년 12월조, 欽明紀 16년 2월조
먼저, 백제가 507년부터 562년 사이에 24회나 사자를 파견하여 야마토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추구한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고구려가 남하정책으로 백제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백제는 신라와의 혼인동맹을 통해 553년까지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백제는 북방의 對 고구려전에서는 신라와 협력관계에 있었지만 남방의 임나 지역에서는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신라와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다. 백제로서는 對 고구려전에서 신라와의 협조를 깨지 않기 위해서 임나 지역을 둘러싼 다툼에서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려고 노력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과 동의 압력을 받고 있던 백제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눈을 돌린 곳은 4세기 이래 협력관계에 있던 야마토 정권이었다.
이에 대해 야마토 정권 측에서도 15회에 걸쳐 사자를 파견하면서 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추구한 배경은 무엇일까? 당시 야마토 정권은 고대국가 형성기에 있었고, 지적 노동의 독점을 통해 일본을 장기간 지배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때문에 야마토 정권의 지배층으로서는 그 지위를 획득하고 유지하는 데 있어 선진문물을 독점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백제와의 관계에서 야마토 정권이 요구한 것이 대부분 학자나 선진문물이었다는 사실로도 입증된다.
그렇다면 야마토 정권의 교역 파트너가 왜 가장 가까운 신라가 아닌 백제였을까? 그것은 백제가 황해를 사이에 두고 중국 남조와 가장 활발히 교류했다는 데에 정답이 있다. 백제가 적극적으로 남조의 선진문물을 도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북조의 견제를 받았기 때문에 남조와의 교류하기 용이하지 않았고, 신라는 지리적 위치상 백제를 통하지 않고서는 중국과 교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야마토 정권은 선진문물의 도입을 중요 과제로 하면서도 중국과 직접적인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서기 기록 503-563(繼體朝 존속기간)중에 중국과의 직접교류 기록은 단 1건도 없다.
간접적인 루트를 통해 중국의 문물을 도입해야 했으며, 중국과의 교류에 적극적이었던 백제를 교역 파트너로 선택한 것이다.
백제와 왜 양국은 상당히 실제적인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가 파견한 총 24회의 사신 파견 중 백제의 요구가 적시된 것은 14회로, 임나 관련 부분 5회(임나의 할양에 대한 부분 3회, 임나의 관리 부분 2회) 임나관련 부분에서는 야마토 정권이 임나에 직접 의사를 전달하지 않고, 대부분 백제를 통해서 의사를 표시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왜는 임나를 직접 지배했다기 보다는 백제에 대한 군사원조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 나머지 9회는 군수물자 및 원군 요청이었다. 이런 백제의 군사적 요청에 야마토 정권은 10회에 걸쳐 군수물자를 제공함으로써,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백제에 파견된 야마토 정권의 용병 규모는 500명에서 1000명 정도였다고 생각된다. 일본서기에 백제에 대한 파병 병력 수가 3회 기록되어 있다. 그 중 554년 관산성 싸움에서 1000명의 병력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 554년 정월기록 - ‘우치오미는 “군사의 수는 1000명이고 말은 100필, 선박은 40척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백제는 야마토 정권의 군사적 원조에 화답하듯 10여회에 걸쳐 오경박사를 중심으로 학자나 전문 지식인, 그리고 승·불경 등의 불교관계 물건을 제공했다.
따라서 6세기의 백제와 왜의 관계는 일방적으로 백제가 문화적 산물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 용병의 수출, 선진문물 수입의 관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