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 최시형과 동학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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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과 동학의 변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해월 최시형과 동학의 변천
1.해월의 생애
해월의 출생과 청소년기의 어려웠던 생활은 수운과 비슷한 대목이 적지않다. 해월은 1827년 3월 21일 경주 동촌의 황오리에서 부친 종수와 모친 월성 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5세 때 어머니를 잃고 15세 때 아버지를 잃어 어려서부터 어렵고 힘든 성장과정을 거치게 됐다. 해월이 어려서 일찍 부모를 여의였다는 사실은 교조의 어린 시절과 흡사하다. 수운 역시 어렸을 때 부모를 모두 여의고 힘든 초연생활을 보냈다.
해월은 생계를 도모하기 위해 ‘동에서 종노릇하며 서에서 고용살이’를 해야 했으며, 17세 때부터는 종이를 만드는 공장에 들어가 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9세에 흥해지방의 밀양 손씨 여성과 결혼해 한동안 처가가 있는 흥해지방에서 생활을 했지만 처가도 생활이 곤궁해 수차례 이사를 다녔다.
해월의 동학입도 경위에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1861년 수운으로부터 동학의 가르침을 전해받고 입도했다는 설과 1866년에 강원도 간성에 사는 필묵상 박춘서로부터 동학을 전수받아 입도했다는 설이 그것이다. 수운의 일대기를 담은 ‘도원기서’나 ‘수운행록’등에는 해월이 이미 1862년 3월 이전부터 동학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로 미루어 수운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고 입도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듯하다.
동학에 입도한 해월은 먼저 수운이 전해준 주문을 열심히 외었다. 수운은 제자들에게 주문을 내려줌에 있어서 제일 먼저 초학(初學) 주문이라 하여 13자의 주문을 주었다.
해월은 수운이 준 주문을 받아 열심히 외우기 시작했다. 그는 어려웠던 가정환경 때문에 글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어서 한문을 읽고 쓰지 못하고 겨우 한글만을 읽고 쓸 수 있을 정도였지만 주문을 열심히 외우고 공부했다.
그는 입도 직후부터 수운이 지니고 있는 강령의 능력이나 수운의 체험한 바 있는 신비적인 체험을 체득하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했다. ‘천어’를 듣기 위하여 추운 겨울밤에 얼음을 깨어 목욕을 하는 도중 공중으로부터 천어를 들었다거나, 교조의 강령의 능력이나 신비적인 경험을 얻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대목이 천도교 관련 자료에 자주 나타난다.
수운 생존 당시 다른 제자들은 글을 짓거나 교조와 더불어 동학의 가르침에 대해 문답을 나눌 수 있는 유교적 교양과 한문을 구사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해월은 그렇지 못했다. 따라서 남다른 노력과 독습이 필요했다.
해월은 주문을 열심히 외우며 신비체험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수련을 쌓은 점은 사실이지만 유교적 교양이 대단한 수운과 더불어 문답을 나눌 수 있는 실력의 소유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해월은 1863년 수운이 관에 체포되었을 때, 수제자중의 일인으로 지목이 되기는 하지만 도통을 전수받을 만큼 여러 제자들 가운데 뛰어난 제자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해월이 입도했을 당시 그의 신분이나 처지를 고려해 볼 때 별로 학문이 없었던 해월이 유교적 교양이 뛰어났던 수운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면 다만 정성스럽게 수련해가는 돈독한 신앙정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해월이 동학에 입도한 후의 수련과정에서 나타난 바에 의하면 수운으로부터 도통을 전해 받는다는 사실이 모호하기 그지없다.
2. 해월의 제2세 교주로서의 동학중흥
1863년 12월 9일 수운과 수제자, 초기 교문을 이끌던 교인 대부분이 체포되면서 동학교문의 지도체제에 공백이 생기게 되었다. 체포를 모면한 해월은 교조와 교도들의 뒷바라지에 적극 노력했다. 현풍의 곽덕원으로 하여금 종으로 가장하게 하여 수운의 옥중 수발을 들게 하는 등 뒷수습을 맡았다. 그러한 과정에서 해월의 위치는 자연스럽게 후계자의 위치로 부상했다.
1864년 수운이 ‘좌도난정’으로 순도하면서 동학 교도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지도자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돈독한 신앙심을 가진 일부 교도들이 동학교문을 지하에서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영양군 용화동에 은거하고 있는 해월의 소식이 교도들에게 암암리에 전해지면서 많은 교인들이 모여들었다. 1866년 10월 28일 수운의 탄신일에 모인 교인들과 함께 수운을 위한 계를 조직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교조의 생신과 기일의 제사 비용을 마련하며 일년에 두 차례 모임을 통해 흩어진 교인들을 재결속시키면서 동학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해월은 동학의 중심인물이 되면서 도를 선포할 때에는 ‘사인여천’을 화두로 삼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부귀빈천과 노소남녀와 적서노주의 별을 가리지 말라고 했다.
그는 특히 평등사상을 역설하여 “인은 내천이라, 고로 인은 평등하여 차별이 없나니 인이 인위로써 귀천을 분함은 시천에 위함이니, 오도인은 일체 귀천의 차별을 철폐하여 선사의 뜻을 이으므로써 위주하기를 망 하노라.”
해월은 동학의 경전과 가사를 모아서 간행할 필요성을 느끼고 그때까지 구전되어 오던 것을 필사케 하여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편찬하고 1880년대에는 목판으로 간행해 보급시켰다. 교세가 확대되면서 교단적인 조직을 갖추어 각처에 접소를 두고 접주를 내세워 그 지역내의 교세확장과 교도에 대한 교화에 종사케 했다.
이와 함께 동학이 사교가 아니라 보국안민의 종교로서 정부의 공인을 받아야 하리라 생각하고, 먼저 수운의 죄명을 씻는 교조 신원운동과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의 중지를 요구했다. 1892년 연말에 전라도 삼례역의 ‘삼례집회’는 동학농민혁명의 서막이 되었다.
해월은 수운 사후 1864년부터 1898년까지 35년간을 정부의 감시와 체포를 피해 다니며 동학교문을 이끌고 포교에 주력하여 교세를 크게 확장했다. 그리하여 수운의 후계자로서 손색이 없는 지도자가 되었고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