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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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양지향교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양지 향교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양지리에 위치한 양지향교는 1983년 9월 19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23호로 지정되었다. 향교재단에서 소유하고 있다. 1523년(중종 18)에 창건하였다. 1697년(숙종 23) 대성전을 중수하고 1792년(정조 16) 명륜당을 중건하였다. 그 후 1928년, 1967년에 중수하였고 1971년에 명륜당을 복원하였다.
1981년에 대대적인으로 보수하였을 때 대성전, 명륜당, 내삼문을 해체하여 복원하는 도중 1697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망와 1개와 수막새 1개가 발견되었다. 명륜당을 해체하였을 때는 들보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건륭 임자년(建隆壬子年:1792) 3월 29일 묘시(卯時)에 샹량한다”라는 기록과 당시 공사에 관여하였던 현감, 좌수 등 11명의 명단이 있었다. 그 후 “소화(昭和) 3년 무진(戊辰:1928) 2월 25일 미시(未時)에 상량하고 중선(重繕)한다”라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일제강점기에도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1986년에 중수하였다.
양지향교는 마을 뒤쪽 구릉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전체적인 구조는 경사진 대지의 아래쪽 터에 명륜당이 있고 위쪽에는 대성전이 있어 전학 후묘의 형식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나, 명륜당과 동재 터는 대성전의 주축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본래는 외삼문과 좌우로 동재·서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언제 훼철되었는지 알 수 없다.
대성전은 19.66평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익공계(翼工系) 맞배지붕이며, 앞쪽에 개방된 툇간이 있고 옆과 뒤쪽에는 방화벽이 설치되어 있다. 익공의 형태나 가구 수법이 견실한 것으로 미루어 17세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공자를 위시한 5성과 10철, 송의 6현, 한국의 18현의 신위가 봉안되어 있다. 내삼문 왼쪽에 있는 명륜당은 1971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이던 것을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복원하였다. 면적은 12.85평이며 팔작지붕에 홑처마이다. 중앙의 6칸 대청 좌우에 온돌방이 2칸씩 있다. 조선 후기의 소규모 향교 형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양지향교는 과거 조선시대의 교육기관 중 하나로서 만의 의의를 넘어서, 현대 우리 사회 교육에도 큰 영향을 준다. 특히 양지향교는 양지리의 교육 시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양지향교가 순탄하게 그 자체의 역할을 하기에는 역사적으로 힘든 시기가 있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철폐되자 향교와 서원교육 기능은 약화되기 시작 하였으며, 이미 1880년대부터 우리나라가 개방화되면서 함흥의 원산학사를 비롯하여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 각종 신식교육기관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양지에서도 향교교육이 쇠퇴하면서 1908년 지역유지들이 주선하여 향교 내에 추향의숙을 설립, 현대교육을 실시하였으니 이곳이 곧 양지초등학교의 모태가 되었고 현 용인시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초등학교가 되었다. 추향의숙(양지소학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학생 수가 늘어나자 향교건물이 비좁아 인근에 건물을 지어 오늘날 양지초등학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 광복 후에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 못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향교 내에 중학과정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니 이것이 곧 오늘날 용동중학교가 되었다. 위와 같이 양지향교는 수 백 년 간 한문교육을 담당하다 20세기 들어 현대식 교육기관인 양지초등학교, 용동중학교의 산실역할을 하였다.
현재는 양지향교 유림들이 성탄일에 기독교에서 예배를 보듯이 공자탄신일이면 이곳에서 향사를 올리고 지역주민들을 위하여 유림회관을 건립하고 한자교육, 충효사상고취 사업 등을 하고 있다. 지금의 양지향교를 비롯한 전국의 향교들이 교육적 목적이기 보다는 제사의 기능이 더 강화된 상태이다. (현재 11月 유림회관의 확장공사로 명륜당을 임시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2. 향교의 역사
고려의 향교는 고려의 학제(學制)는 당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중앙에는 국자감·동서학당을 두고 지방에는 국자감을 축소한 학교인 향학(鄕學)을 설치하여 지방 문화 향상에 이바지했다. 987년(성종 6) 경학박사(經學博士)·의학박사(醫學搏士)를 각 1명씩 보내어 교육을 담당케 했고, 992년(성종 11) 지방 주·군에 학교(州學)를 세워 생도에게 공부를 권장하였다. 1127년(인종 5) 3월에 여러 주(州)에 학(學)을 세워서 널리 도(道)를 가르치라는 조서(詔書)에 기인한다고 할 것이다. 학교의 제도는 공자(孔子)를 제사하는 문선왕묘(文宣王廟)를 중심으로 하여 강당으로서 명륜당(明倫堂)이 설치되었으며, 교사는 조교(助敎)라고 하였다. 의종 이후 국정이 문란하고 학제 또한 퇴폐하니 향교도 역시 쇠퇴한 상태였다. 결국 향교는 신 집권기와 몽고와 왜의 침입 등으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그 후 충숙왕은 학교를 진흥시키려고 이각(李殼)으로 하여금 여러 군을 순력시켜서 향교를 부흥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고려 말에 지방관과 유생들의 노력에 의해 점점 그 기능을 회복하고 숫자도 증가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392년(태조 1)에 여러 도(道)와 안찰사(按察使)에 명하여 학교의 흥폐로써 지방관고과(地方官考課)의 법으로 삼고 크게 교학의 쇄신을 꾀하였다. 여기에서 부·목·군·현에 각각 1교씩 설립하고 점차 전국에 이르게 되었다. 향교에는 문묘(文廟)·명륜당(明倫堂) 및 중국·한국의 선현(先賢)께 제사하는 동서양무(東西兩)·동서양재(東西兩齋)가 있다. 동서양재는 명륜당(강당)의 전면에 있으며 동재에는 양반, 서재에는 서류(庶流)를 두고 보통 내외 양사(兩舍)로 갈라진다. 내사에 있는 자는 내사생(內舍生)이라 하고, 외사에는 내사생을 뽑기 위한 증랑생(增廣生)을 두었다. 유생의 수는 부·목에 90인, 도호부(都護府)에 70인, 군에 50인, 현에 30인으로 정하고, 직원으로는 교수(敎授)·훈도(訓導) 각 1인, 소군(小郡)에는 훈도만을 두었으며, 또 교예(校)가 속하고 있었다. 또한 독서와 일과(日課)를 수령(守令)이 매월 관찰사에 보고하여 우수한 교관에게는 호역(戶役)을 양감(量感)하여 주었다. 향교에는 그 공수(公需)를 위하여 정부에서 학전(學田) 7결 5결을 지급하고 그 수세(收稅)로써 비용을 충당케 하였으나, 지방민으로부터 징수 또는 매수 등에 의한 많은 전지(田地)를 소유한 곳도 적지 않았다. 이들 향교는 중앙의 사학(四學)과 같으며 여기에서 수학한 후 1차 과거에 합격자는 생원(生員)·진사(進士)의 칭호를 받고 성균관에 가게 되며, 다시 문과시에 응하여 고급관위(高級官位)에 오르는 자격을 얻었다. 그러므로 중기 이후의 향교는 과거의 준비장이 되고 서원(書院)이 발흥하게 되자 점차 쇠미하여졌다.
1894년(고종 31) 말에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향교는 완전히 이름만이 남아 문묘를 향사(享祀)할 따름이었다. 이후 교육제도의 확립에 따라 각종 교육기관은 정비되었으며, 향교는 1911년 조선총독부령에 따라 문묘직원(文廟直員)을 명예직으로 두어 부윤 혹은 군수의 감독 하에 두고 문묘를 지키고 서무(庶務)에 종사케 하였다. 학전, 지방 유림의 구림(鳩林) 등 향교재산은 대한제국 정부 학부(學部)의 소관으로 1900년(융희 4) 4월에 향교 재산관리규정을 정하고 부윤·군수로 하여금 정리케 하고 그 수입은 부·군내의 공립학교 또는 지정하는 학교의 경비 또는 문묘의 수리·향사비로 충당케 하였다. 1918년 조사에 따르면 향교의 총수 335, 소관 토지 48만 평이었다. 그 후 재산 관리규정은 폐기되어 공립학교의 경비에 사용되지 않고 문묘의 유지와 사회교화 사업의 시설에만 충당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