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사태와 신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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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212 사태와 신군부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머리말
10.26사태의 발생은 차지철과 박정희의 죽음을 불러 일으켰고 국민들은 이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민주화에 대해 기대에 부풀어 있었고 이때 등장한 신군부의 쿠데타(12월의 쿠데타,다른말로는 12.12사태)로 민중의 민주화에 열망은 실망으로 바뀌었다.포스트김으로 일컫는(D.J,Y.S,J.F)3김이 이끌었던(약간 어휘가 이상하지만) 서울의 봄으로 표현되는 당시의 민주화 열기를 진압하고 정당성 없이 신군부 정권은 12년이나 유지되었으나 끊임없는 국민의 저항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본론
1.12.12사태의 발생과 신군부의 등장
(1)10.26사태후의 상황
10.26사태의 발생은 당시에 미국으로서는 충격적 일이었다.미국은 당시에 북한이 관여했을 가능성을 조용히 제시했다.당시에 박정희대통령은 카리스마적 권위를 이용해서 한국의 경제를 기하급수적으로 성장시켰으며 이로 인해 북한의 표적이 됀게 아닐까 하고 고민했다.이후에 10.26사태 직후의 정치적 상황전개를 보면,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권한대행직에 취임하고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발령했다.(79.10.27),
유신체제를 버리고 민주화한다는 것은 유신잔당들이나 신군부, 고위관료들에게는 전쟁도 않고 무장해제를 하는 꼴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조심스레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이후에 드러난 사실들을 보면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부터 정권을 잡을 사전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증거로 12.12 전부터 당시 보안사, 즉 합동수사본부내에 ‘언론대책반’을 운영했다는 사실이다. 또하나는 1980년 초, 소위 ‘충정훈련’이라는 고도의 폭동진압훈련을 실시했다. 당시 전두환은 “북한이 남침을 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고, 심각한 소요사태에 강력한 대책이 필요했기때문”이라고 주장했으며 이는 당시 북한의 48부대의 전진배치탓에 현실로 받아들여졌다.그러나 이는 신군부 정권이 정권장악음모를 진해할 경우, 예상되는 국민들의 저항에 대비하여 이 같은 진압훈련을 치밀하게 준비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12월의 군부대 쿠데타발생(12.12사태발생)그리고 역쿠데타모의.
1)신군부세력의 등장
보안사령부는 당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최초에 주어진 임무였던 북한관련인물 색출 때문에 그들은 법적 근거없이도 체포구금을 할수있었으며,이로인해 보안사령부는 시민들과 군인들에게 기피대상이었다.실제로 박대통령은 그 위력을 잘 알기에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으로 임명시키고 자기수하에 뒀다.당시에 전두환은 박대통령을 아버지로 모시며 그에게서 여러가지를 배웠으며 그에게 많이 의지 했다.어쩌면 이것이 그의 야망을 키우는데 촉진제 역활을 했으리라 본다.그러나 10.26피살사건으로 박정희가 암살당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로인해 자기안보와 미래에 대해 걱정을 하기 시작했으며 자기 처후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이탓에 그는 자기 동기들과함께 칠성회라는 조직을 만들었고 그 멤버들을 중심으로 점차 세력을 확충해갔다.이것이 신군부 쿠데타의 주역들의 모임인 하나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