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7.4 남북 공동성명
공동성명의 추진 배경과 진행과정
공동성명의 근간이 되는 합의 내용들과 의의
7.4 남북 공동성명의 한계
7.4 남북 공동성명의 계승
, 경기도 광주 대단지 사건 1971년 정부에서 용두동·마장동·숭인동 등의 집을 뜯고 경기도 광주로 사람들을 집단 이주시킨 사건
, 함평 고구마 사건 가농주도로 기도회ㆍ시위ㆍ단식 등을 통해 농협 측의 수매자금 유용이 드러나며 피해액 309만원을 보상받아 民이 官을 이긴 최초의 사건
등 대내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리고 북한의 경우는 1971년 8월 6일에 이미 통일을 위한 남북대화를 제안 북한의 김일성 수상은 시아누크 환영연설을 통해 ‘남한의 민주공화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 사회단체 및 개별적 인사들과 아무 때나 접촉할 용의’를 표명함
하였는데 이는 미국과 중국의 화해무드를 등에 업은 것이라 볼 수 있었다. 당시는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우호적으로 변해가던 시기였다. 결국 1972년에는 닉슨과 주은래가 중국 상해에서 공동성명 미국의 대한민국에 대한 지지와 남한정부의 한반도 긴장 완화, 교류증진에의 노력을 지지하는 하는 것과 중국의 북한의 평화통일 8개항 방안과 언커크 해체 요구입장의 지지를 주 내용으로 함
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대외적 상황을 배경으로 둔 북한의 남북회담 제스처에 남한 정부가 부응함으로써 1971년 9월 20일 비밀리에 남북 적십자 회담이 개최되었다. 이후 서울과 평양 간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문제 협의를 위한 여러 회담들이 진행되었다. 남한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1972년 5월 2일부터 5월 5일까지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의 김영주 지족지도부장과 회담을 진행하였으며 1972년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는 박성철 제2부수상이 서울을 방문하여 이후락 부장과 회담을 진행하였다. 당시 남한의 박정희 대통령은 72년 5.16 기념치사에서 이른바 통일문제의 단계적 접근을 주창 - 통일은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야하며 단계적인 접근을 중시한다. 진행 중인 남북 적십자 회담은 가장 현실적이며 착실한 접근방법이다.
하는데 이는 당시 정권 차원에서 북한과의 대화와 협력을 중시하고 있었음을 암시해준다. 그리고 마침내 남북 양측은 6월 29일 서명을 하고 7월 4일 공동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역사적인 7.4 남북 공동성명이 선언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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