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제갈량은 누구인가
2. 제갈량의 생애
3. 관련 에피소드
4. 관련 성어
5. 본문
당신은 누구냐?
나?
자는 공명(孔明). 시호는 충무(忠武). 낭야군 양도현(琅句郡 陽都縣:山東省 沂水縣) 출생. 호족(豪族) 출신이었으나 어릴 때 아버지와 사별하여 형주(荊州:湖北省)에서 숙부 제갈 현(諸葛玄)의 손에서 자랐다. 후한 말의 전란을 피하여 사관(仕官)하지 않았으나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 일컬어졌다.
207년(建安 12) 위(魏)의 조조(曹操)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劉備:玄德)로부터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로써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進言)하고 군신수어지교(君臣水魚之交)를 맺었다. 이듬해, 오(吳)의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의 대군을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익주(益州)를 유비의 영유(領有)로 하였다. 그후도 수많은 전공(戰功)을 세웠고, 221년(章武 1) 한(漢)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재상이 되었다.
유비가 죽은 후는 어린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보필하여 재차 오(吳)와 연합, 위(魏)와 항쟁하였으며, 생산을 장려하여 민치(民治)를 꾀하고, 윈난[雲南]으로 진출하여 개발을 도모하는 등 촉(蜀)의 경영에 힘썼으나 위(魏)와의 국력의 차이는 어쩔 수 없어, 국세가 기울어 가는 가운데, 위의 장군 사마 의(司馬懿)와 오장원(五丈原)에서 대진 중 병몰하였다. 위와 싸우기 위하여 출진할 때 올린 《전출사표(前出師表)》 《후출사표(後出師表)》는 천고(千古)의 명문으로 이것을 읽고 울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일컬어졌다.
나 이렇게 살았다…
출생과 형주 시절
181년 낭야군의 지방관이었던 제갈규(諸葛珪)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5세가 되기 전에 양친을 여의어 한동안 백부 제갈현이 예장에서 제갈량을 돌봤다. 제갈현이 죽자 형주로 온 제갈량은 스스로 농사를 하고, 양보음이라는 노래를 즐겨 불렀다. 당시 형주는 난세를 피해 온 명망 높은 선비들이 많았는데, 제갈량은 이들과 교류를 하면서 인맥을 넓히고 지식을 쌓았다.
입촉 및 유비 사망 전까지
연의에서는 방통이 죽자 군대를 이끌고 참전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정사에서는 유비와 방통이
부수관에서 성도로 향할때에 형주에서 호응하여 서쪽으로 진군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214년 유장이 항복한 후에는 군사장군에 임명이 되는데, 제갈량은 이후 유비가 황제가 되어
승상이 되기 전까지 이 직위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위나라에서 한중 공방전을 치르기 전까지
제갈량의 존재조차 몰랐다는 점 등을 들어 제갈량이 입촉 당시 혹은 유비가 죽기 전까지 중용이
안되었다고 평가를 내리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가후전에서는 이미 조조가 한중을 공략하기 전에
제갈량의 정치가 뛰어났다고 평가했다는 점, 또한 유비가 한중왕이 되기 전까지 좌장군이었지만
황충은 한중전 당시 하후연을 전사시켜 좌장군보다 높은 정서장군이 되었다는 점에서,
군사장군이라는 직위도 유비가 임시로 만들긴 했으나 그 권한이 상당했으리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남정
유비(선주)가 죽고 유선(후주)이 황제로 즉위했을 때에도, 그리고 죽기 전까지 줄곧 제갈량은
승상으로 14년 간이나 있었다. 당시 익주 남쪽의 호족이었던 옹개, 고정, 주포 등이 손권으로부터 암약을 받고 소란을 피우고 있었으므로, 제갈량은 225년 봄에 남정을 개시하여 그 해 겨울에 반란을 평정한다.
북벌
227년 제갈량은 유비에게 부탁받은 후사를 실현하려고 위나라를 정벌하려고 군사를 일으켰다. 출진하기에 앞서 올린 상주문은 원문 350자로, 이것이 그 유명한 ‘출사표’이다. 이는 제갈량이 살아 돌아오지 않을 것을 각오하고, 황제에 대한 여러 가지 훈계를 적은 명문이다.
내가 궁금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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