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과 도자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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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세종과 도자공예
한국 도자 사 중 가장 큰 변화가 있었던 시기는 조선 시대라 할 수 있다. 고려의 체제를 개혁하여 정치와 사회적인 기반을 확고히 하였고 한글 창제와 함께 문화의 전성기를 이룬 때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자기는 많은 사람들이 흔히 들었지만 직접 보면 생소한 백자와 분청자였다.
백자와 분청자 가 조선초기부터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다. 백자 보다는 분청자가 먼저 알려 졌는데 분청자 사용 전에는 고려 시대 때 발달한 고려청자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주로 고려청자는 왕실과 사대부의 장식용과 감상용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서민들은 동으로 만든 유기나 목기를 사용하였다. 조선 초 중국에 다녀온 조선의 유학자들이 중국인들이 실 생활에서 도자기 그릇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영향을 받아 일반 서민들에게도 도자 그릇이 퍼지게 되었다. 원래 널리 퍼져있던 고려청자는 일반 생활에서 사용하기에는 강도가 약했으며 제작과정에서 손도 많이 갔다. 그래서 청자 보다 색이 칙칙하더라도 사람들은 튼튼하며 생활에 쓸 수 있는 대접 등을 만들기를 원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흙이 나는 어느 곳이던 자기를 만들어 쓸 수 있도록 도자기를 굽는 가마가 전국적으로 퍼져 총 324개의 도자소가 있었다.
이 맘 때 쯤 조선 사회에서는 유교적 사상이 유행 중 이었는데 검소, 질박, 겸손을 덕목으로 하였다. 이런 결백함의 상징으로 왕실에 백자가 퍼지게 되었고 이것이 더욱 유행하여 일반 사대부에는 백토로 분장된 분청자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명에서 선물로 들어오는 청화 백자도 조선의 백자 유행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세종은 백자를 여러 모로 사용 한 듯하다. 명은 조선에 해마다 많은 공물을 요구 하였는데 명은 그 때 마다 대량의 은을 요구 하였다. 그 당시 왕실에서는 손님맞이 용 그릇으로 분청과 은그릇을 사용 하였는데 은그릇은 왕실의 중요한 그릇 이었다. 하지만 명의 사신을 맞을 때 은그릇을 사용하면서 은이 없다고 말 할 수 없어 은에 가장 가까운 백자를 사용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왕실과 관청에서 사용하는 중요한 그릇으로 삼았다.
세종은 평소 생활에서 은그릇 보다 백자를 사용하였는데 ,1440년대 에 “각 전에서 은기 대신 백자를 사용하라”는 기록이 있다. 왕실에서는 특히 청화 백자를 좋아 하였고 중국에서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 알아보기 위해 노력하였다.
사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층 들이 백자를 사용하게 되고, 백자에서 그들이 갖는 성리학적 세계에 대한 이미지, 새로우며 깔끔하고 튼튼한 특징을 더욱 선호하게 되었다.
세종의 왕실에서 사용하는 백자는 백자의 재료가 많이 나며 서울에서 가까운 광주에서 만들어 졌으며 이때에 각 지방의 도자 소 에서는 관청에 바치는 그릇들을 만들었다. 만들어 지는 그릇마다 만들어진 지방의 이름을 쓰게 하였는데 그릇의 질이 떨어지는 곳은 선별하여 혼을 내었고 그 책임을 묻기 위해 지역 명을 새겨 넣었다.
이 당시 각 지방 도자 소에서 관청으로 바쳐지는 그릇은 최고급 이었으며 중국의 사신을 위한 잔치 등에 사용 되었다. 관청에서 각 소의 그릇을 모아 잔치가 벌어지는 곳이나 제사 등에 보내기도하고 다시 갖고 오게도 하였다.
그라고 왕의 식사와 잔치를 관리하는 ‘사옹원’이 세워졌으며 ‘번조관’이라는 책임 관리도 두었다. 사옹원에 둘 사기장을 구하기 위해 전국의 도공1140명을 호적에 올렸으며 나라에 바치는 세금 대신 자신이 만든 그릇을 바치도록 하였다. 당시 겨울은 추웠으므로 쉬게하고 봄, 여름, 가을 9개월을 세 팀으로 나누어 일을 시켰다.
이처럼 세종은 도자 그릇을 사용하며 그것을 관리하기 위한 관청도 두었으며 재료를 구하기도, 만들기도 어렵고 녹까지 스는 금속 식기 등을 도자 그릇의 사용으로 자연스럽게 변화 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조선의 공예 문화와 기술 발달에 도움을 주며 조선에서 많이 나는 흙으로 만드니 국산화와 함께 실질적으로는 일상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세종이 예술 적인 방면으로 크게 관심을 두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음악의 음계를 정리하기도 하였지만 그릇을 만드는 사기장들을 그저 그릇이 나오는 공장처럼 돌렸다는 생각이 든다. 대게 사기장들의 생활은 가난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농사를 지었지만 본업으로 삼은 것은 아니어서 흉년이 들면 굶어 죽기도 했다고 한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실력이 출중한 이런 장인들을 잃었으니 얼마나 아쉬운 일인가.
이런 조선장인 들의 실력을 일찍 알아본 것은 오히려 일본인 들이었다. 일본인 들은 조선의 막사발에 차를 마시며 그것을 고급문화로 여겼으며 하나의 명예와 부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리고 만지기 어려운 신과 같은 그릇이라 하여 ‘신기器’라 부르기도 했다. 막사발 하나와 재산을 바꾸려 하기도 하였으며 그릇에 절을 하며 애지중지 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후에 조선에 가면 이런 막사발들이 있다 하여 일어나는 전쟁이 바로 임진왜란이며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 부른다. 그리고 일본은 장인들을 납치, 극진한 대우를 하며 긄을 만들게 하였고 그 후 조선, 그리고 한국의 도자 사에 큰 타격을 입었으며 입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 도자의 맥이 끊긴 일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 의해 훌륭한 장인과 작품들이 사라진 것은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아쉬움은 감출 수가 없다. 태종 이후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와 함께 조선에서는 분청이 발달하기 시작하였고 백자가 겸손함의 미덕으로 떠오르며 한국 도자사의 큰 변화와 함께 한 획을 그은 때였다. 그리고 관청의 설립으로 보다 전문적인 장인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던 때였다.
작품의 질을 높이고 조선의 아름다움을 더욱 살릴 수 있는 조선의 공예와 그 장인 들을 잃은 것이 안타까울 분이다. 그저 그릇을 만드는 일꾼이 아닌 예술가로서 인정받았다면 (너무 큰 욕심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을 잃지 않았다면 지금 한국은 중국과 일본을 월등히 앞서는 공예 강국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공예학도의 아쉬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