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개석蔣介石
#동기
저번학기 동아시아 문화에 대한 교양수업을 들으면서 장개석이란 인물에 대한 동영상을 시청하게 되었다. 평소 중국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에 아무런 흥미도 없이 동영상을 시청하게 되었는데 얼마보지 않아 장개석이란 인물에 대하여 궁금해지면서 동영상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동영상을 시청하였다. 물론 1년이 지난 지금은 이 인물에 대한 동영상만 보았기 때문에 잘 기억나지도 않을뿐더러 잘 알지도 못한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중국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이 인물에 대해 조사해 보고자 장개석을 선정하게 되었다. 참고로 장개석은 우리나라 독립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국공훈장까지 받은 인물로서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기존연구 및 평가
이 인물은 흔히 불리는 장제스의 제스(介石)는 바로 그의 자이다. 종교는 프리메이슨이며, 황푸군관학교 교장, 국민혁명군사령관,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 중화민국 행정원장, 국민정부군사위원회위원장, 중국 국민당 총재, 삼민주의 청년단 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5월 20일부터 1949년1월 21일까지는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과 중국 본토의 국가원수를 지냈고 1950년3월 1일부터 1975년4월 5일까지 2~5대 중화민국총통을 역임했다. 193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적극 후원하기도 했다. 중화민국 내에선 쑨원 다음으로 제2의 국부(國父)로 불린다.
장제스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관하여는 중화민국의 지도자로서 칭송받는 면과 공산주의자를 탄압한 4·12 쿠테타를 일으킨 독재자로서 비판받는 부정적인 평가의 양면이 존재한다. 장제스는 국공내전에서 패한 이유가 국민당의 부정부패이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중화민국의 공직자들의 부정부패를 강력한 처벌로 일소하였다. 하지만 국민당이외의 정당들은 형식적인 정당에 불과한 국민당 1당독재, 진보적인 정치세력에 대한 백색테러로 불리는 보수테러, 독재에 저항하는 반체제인사들에 대한 탄압으로 중화민국의 민주주의가 늦게 뿌리내리게 한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본문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
1925년3월 12일 쑨원이 죽자 국민당의 권력을 놓고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장제스는 국민당 우파로 기울었고 쑨원의 또다른 신임을 받고 있던 왕징웨이는 국민당 좌파의 우두머리가 되어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장제스는 상대적으로 왕보다 국민당내의 서열이 낮았지만 황푸학교 출신의 부하들의 지지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산함 사건을 일으켜 결국 국민당 권력을 잡았다.
한편 국민당은 1925년 국민혁명군을 창설하고 장제스는 그 총사령관이 되어 군벌들로부터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쳤는데 이때 국민당군은 세 개의 파로 나뉘어 북쪽으로 진군했다. 이때 우한으로 진군한 왕징웨이등 국민당 좌파는 우한에서 장제스의 국민당과 별개의 우한국민당 정부를 세우고 장제스와 대립하게 되는데 난징과 상하이를 탈환한 후 장제스는 국민당내 좌파와 공산당을 소탕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1927년4월 12일 장제스는 상하이에서 대대적인 공산당 소탕작전을 펼치고 이후 중국 전역에서 대규모 공산주의자 학살이 일어났다. (4.12사건 참조) 이 사건으로 좌파을 일소한 장제스는 거침없이 북벌을 단행하였고 1928년 6월 베이징을 탈환하고 마지막 남은 펑톈군벌 장쉐량을 복속시켜 마친내 중국을 국민당의 깃발 아래 통일 시켰다.
한편 장은 유력하고 부유한 가문인 쑹가문과 유대를 맺고 기독교로 개종한 후 1927년쑹메이링과 결혼하였다.
장제스는 국민당 정권의 총통이 되어 강력한 군을 바탕으로 권력을 잡았다. 원래 쑨원의 계획대로라면 그는 새로운 중국은 민주적인 절차와 헌법을 가져야 했으나 장은 당면한 현안문제들 (잔존 군벌의 불안, 중국 공산당의 분열, 가속화 하는 일본의 침략)등을 들어 자유주의적 운동을 탄압하고 완전한 개혁을 이루지 못하였다. 장제스는 특히 공산당이 지배하는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기 전까지는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지 않기로 하였고 일본은 야금야금 대륙을 침입해 들어왔다. 그는 1930년부터 지속적으로 공산당 지배지역에 대한 토벌전을 벌였는데 완전히 섬멸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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