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 쾌락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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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에피쿠로스 쾌락주의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에피쿠로스 쾌락주의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쾌락이 중심이 되는 철학이다. 스토아 철학과 마찬가지로 에피쿠로스주의 철학 역시 헬레니즘 시대의 암울한 현실에 대한 대응 방식들 중 하나이다. 에피쿠로스는 고통스런 현실을 쾌락으로 통해 이겨내보려고 했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관능적 쾌락이나 방탕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 많은 사람들은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 하면 인간의 본능만을 중시하고 감각적, 육체적 쾌락만을 생각하게 되는데 이는 에피쿠로스가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다. 에피쿠로스 학파에서 쾌락의 정의를 내릴 때 ‘육체적인 고통과 마음의 근심이 없는 상태’라고 규정하고 있다. 단순하면서도 소박하다고 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감각적 쾌락과 방탕한 삶을 멀리 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런것이 오히려 고통과 근심을 더 키우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의 양을 통해서 보다는 고통을 최소화함으로서 쾌락을 극대화 하려한 것 같다.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에피쿠로스는 간소하게 살아가라고 한다. 잡다한 일들에 많이 연관되고 복잡하게 삶을 살수록 삶을 위태롭고 저해시키는 요소들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결국 추구해야 할 욕구와 추구하지 말아야 할 욕구를 구분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욕구라면 추구해서는 안된다. 에피쿠로스는 일단 욕구를 세 가지로 구별한다. 첫 번째로 식욕이 대표적인데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구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성욕이 대표적인데 자연적이지만 필수적이지는 않다고 할 수 있다. 성행위를 안한다고 해서 삶이 위협당하는건 아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명예욕이 대표적인데 근거가 없거나 비자연적인 욕구라고 할 수 있다. 명예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고 자연스럽지도 않고 필수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고 보았다. 에피쿠로스가 이상적으로 여겼던 삶의 모습은 가까운 친구들과 교제를 즐기고 그들과 함께 검소한 식사를 하며 소소하게 살하가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다른 걱정 하지 않고 자기 주변관리 제대로 하면서 소박하게 살면 고통을 줄이고 쾌락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쾌락은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동적인 쾌락과 정적인 쾌락인데, 우선 동적인 쾌락은 고통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쾌락이다. 음식을 먹음으로써 배고픔이라는 고통을 제거하는 경우이다.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구가 주로 동적인 쾌락을 준다. 정적인 쾌락은 고통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를 유지하는 데서 오는 쾌락이다. 정적인 쾌락은 동적인 쾌락을 전제로 한다. 감각적이며 자연적인 욕구들을 충족시키는 걸 통해 고통을 제거하고, 그 과정에서 동적 쾌락을 느낀 후에 정적인 쾌락에 도달할 수 있다. 정적인 쾌락은 아무런 고통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에서 누리는 것이다. 극도로 평온한 상태, 이걸 아타락시아라 불렀다. 그리고 이것은 에피쿠로스 학파에 있어 삶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의 평정심을 방해하는 주요 요인이다. 죽음이란 생각만해도 인간을 공포에 떨게 만든다. 따라서 에피쿠로스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길을 제시하였다. 에피쿠로스는 원자론적 유물론을 도입한다. 이것은 일원론으로써 세계가 빈 공간과 그 안에서 운동하는 원자들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 역시 원자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인간의 느낌이나 사고, 영혼도 원자의 운동으로 보고 인간이 죽음에 이르게 되면 영혼도 사라진다고 하였다. 죽음과 동시에 영혼이 없어져버리니 죽음의 고통이라는 인간은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 인간이 죽는다면, 어떠한 고통도 느낄 수 없게 되버린다.
에피쿠로스는 고통을 최소화하는 실천적 지혜를 제시해주는 것 같다. 실천적 지혜는 곧 이성을 잘 발휘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이성을 통해 고통의 근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이성적 판단을 통해 고통을 줄이고 쾌락을 늘리기 위해 절제, 정의, 우정 등의 가치를 중요시 해야 한다는걸 강조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치료하기 위해서 상담자를 찾아온다. 대부분 욕구를 현실에서 충족시키지 못해서 불만족을 표출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에피쿠로스의 최소한의 삶의 추구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깨우침을 느끼게 해주고 성숙하게 이끌어 줄 것 같다.
6- P1 당신의 고객이 자아수양 때문에 고통 받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는가? 당신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당장 눈앞의 쾌락만을 생각하는 사람들, 자기가 욕망하는 것을 쉽게 참기 힘든 사람들, 당장의 바라는 것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인격 수양이 덜 된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훨씬 더 가치있는 할 일을 미루어둔채 당장 눈앞의 욕망할 만한 것들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아수양을 하려고 한다. 자아수양이란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갈고닦아 품성이나 지식, 도덕 따위를 높은 경지에 끌어올리는 행위이다. 하지만 이러한 높은 경지를 위해서 정진하는 것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이 따른다. 이러한 고통은 어떠한 결핍이 있어 상담이 필요한 내담자뿐만 아니라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가진 모든 인간이 겪는 고통이다. 이 고통은 사람들에게 절망감을 줄 수 있지만 그 고통은 극복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이겨낼 수 없을 거 같은 고난과 고통 속을 극복해 그것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 사람은 더욱 더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고 한 단계 더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자아수양을 하는 목적은 분명 결과적으로 더 나은 삶과 미래를 위한 것일 것이다. 하지만 내담자가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인 자아수양자체로인해 고통을 받는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할 것이다. 가령 절제력이 약한 수험생을 예로 들어보겠다. 그는 분명한 장래희망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미래를 위해 현재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학업에 매진해야 하는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안다는 것과 행동한다는 것은 늘 일치하는 것이 아닌 법. 어느 순간 주변의 유혹에 넘어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절제하지 못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공부는 뒤로한 채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을 마시고 유흥에 빠진다. 그러나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억지스럽게 절제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당장의 욕구를 억제한다고 해서 무조건 공부가 잘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현재의 욕구충족이 삶의 활력을 증진시킬 수 있다. 또한 그러한 본능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억지로 절제할 것을 강요하기보다는 내담자가 자신의 행동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죄책감을 느끼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하루 이틀이 아닌 계속해서 그러한 방탕한 생활이 연속이 된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스스로 자제력을 키울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해줄 수 있다. 예를 들어 내담자가 스스로 규칙을 정해 일주일간 열심히 공부한 대가로 주말에는 마음껏 놀면서 하고 싶은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처럼 말이다. 당장 공부가 하기 싫지만 잠시 순간의 쾌락을 뒤로 미루고 학업에 매진한다면 그는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상담자는 내담자가 죄책감과 무기력감을 가지지 않으면서 내담자에게 왜 지금의 행동을 변화시켜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내담자에게 어떠한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인지에 대해 이해시키고 내담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조절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6 - Q2 상담자, 간병인이 고객에게 영원히 교육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안된다면 왜 어떤 구체적인 예가 떠오르는가?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상담이 아닌 교육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담자가 문제를 바라보고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 사고의 지평을 넓혀 당면한 문제를 넘어서 당면한 문제와 유사한 모든 문제들, 내담자 삶의 다른 문제들에 철학적인 삶의 방식을 갖게 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내담자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 철학 상담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상담을 통해 내담자에게 사는 방법에 대해 안내를 할 수 있을 뿐이지 실제로 생각하고 활동하는 등 실천해야 할 사람은 내담자 자신이기 때문이다. 상담자가 영원히 고객을 상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일차적으로 상담사는 내담자를 평생 만날 수 없으며, 일정기간이 지나면 상담은 종료된다. 또한 내담자가 가지고 있는 주된 문제가 해결이 되었다면 더 이상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개입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상담자는 내담자의 모든 문제를 완벽히 해결해 줄 수 있는 초인이 아니다. 상담자역시 내담자와 비슷한 인간일 뿐이며 다만, 상담을 통해 조금이나마 내담자를 도울 수 있는 방법적 지식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또 그 방법이 정답인 것도 아니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내담자가 상담자보다 더 지혜롭고 현명한 생각을 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담자와 상담자는 서로 다른 경험과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 물론 상담자가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상담을 진행하도록 노력하겠지만 내담자가 상담자가 제안하는 모든 말을 다 인정하고 수용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겉으로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속으로는 적대감을 느끼고 어서 이시간이 끝나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 교육을 받고 나서부터는 내담자 스스로의 발전이 필요하다. 누군가에게 의지해서 배우기만하고 받기만 한다면 더 큰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삶을 고민하고 더 나은 삶의 모습을 위해 노력하는 것, 그 노력으로 상담가를 찾아와 자신의 문제를 함께 고민해 보는 것은 매우 건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기에는 애매하게 전적으로 상담가에게 의존하게 되는 상황은 그렇게 건전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볼때 상담자는 내담자의 머리위에 앉아 답을 정해놓고서 그것만을 쫒아서는 안 될 것이다. 정답은 정해진 것이 아니기에 일방적으로 답을 가르치려고 해서는 안될 것이며, 내담자와 상담자가 자연스러운 대화와 토론을 통해 문제에 대한 해결방법을 함께 찾아가야 할 것이다. 상담자는 지식적으로 교육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 보다는 내담자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고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