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캄보디아의 개관
캄보디아는 근래 적극적인 외자유치 등을 통한 경제발전 및 정국안정에 힘입어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연평균 11%의 고도 경제성장을 이룩했으나, 2008년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인해 7% 경제성장 하였다. 이에 캄보디아의 국가발전을 위한 향후 방안에 대하여 검토하고자 한다.
Ⅱ. 캄보디아의 국내·외 정세
1954년 제네바 선언에 의해 월남이 프랑스로부터 독립됨에 따라 캄보디아는 어부지리로 독립이 됐다. 당시 노로돔 왕의 아들인 시아누크는 민주사회당을 구성하여 정권을 잡고, 남베남과 그 지지세력인 미국, 태국을 캄보디아 안보의 위협세력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다가 65년에는 미국과 단교를 하고, 대신 공산주의 북베트남과 베트콩 군사들이 캄보디아 영토에 주둔하도록 하락하여, 69년부터 미국의 공습을 받기도 한다.
사회주의 노선을 택했던 시아누크왕이 70년 프랑스에 가 있는 동안 정권을 잡은 사람이 미국의 지지를 받는 론놀이었다. 시아누크는 중국에 망명정부를 구성한다. 한편 국내에서는 폴포트가 이끄는 크메르루즈가 론롤에 대항하고 있었다. 크메르루즈는 농촌지역에서 지지를 얻었으며, 75년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하기 2주년전 프놈펜을 함락하였다.
정권을 잡은 폴포트는 당시 인구 8백만명중 2백만명을 살육한다. 76년 폴포트는 한때 크메르 왕국의 영토였던 베트남의 남부지방을 점령하기 위해 베트남과 전쟁을 감행하지만 79년 패배하여 정글로 쫒겨나고 만다. 베트남은 크메르루즈의 장교였다가 베트남으로 망명했던 훈센과 헹삼린을 주축으로 꼭두각시 정권을 세운다. 시아누크는 중국의 압력에 따라 폴포트 등과 연합하여 정권에 대항한다.
이후 소련연방의 해체 여파와 국제무대에서의 고립을 우려한 베트남이 물러간 것은 89년이다. 그렇지만 크메르루즈가 불참을 선언한 가운데 UN의 중재로 총선이 치뤄졌고 시아루크 왕의 아들인 라나리드가 제1총리, 훈센이 제2총리로 선출되었지만, 군사력이 우세한 훈센이 97년 라나리드와 힘겨루기에서 이겨 실질적인 정권을 장악한다. 한편 크메르루즈는 와해의 길로 접어들어 내부의 분열로 체포되어, 구금되었던 폴포트는 98년에 사망하고 크메르루즈는 해체된다. 캄보디아에서 무려 30년 세월동안 전쟁의 포성이 멈출 날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Ⅲ. 법률 및 제도
투자환경과 관련한 우선적 고려 사항은 정치의 안정이다. 정치 불안은 경제 활성화에 걸림돌이 되고 외국인투자의 장애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캄보디아의 정정은 외세 및 내전의 연속, 그리고 1990년대 이후의 연립정부의 형태 유지 등으로 인해 강력한 국가체계가 구축되지 못하고 정치 불안정이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정치가 안정되면, 고도경제성장을 이룰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경제상황은 정치상황 못지 않게 중요하다. 캄보디아는 1989년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했고, 1994년 외국인투자법을 제정하여 시행하고 있다. 경제의 기초를 이루는 사회간접시설은 열악한 편이다. 1996년부터 시작된 제1차 사회경제개발 5개년 계획기간 중에 연평균 7.5%의 성장목표를 계획하였으나, 실제 경제성장률은 4.2%를 기록하였다. 2001년부터 제2차 사회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 중에 있으며, 그 주요 내용은 국가기능의 재건에 중점을 두면서 농업을 포함한 각 분야의 성장을 유도하고 빈곤을 퇴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재정의 자립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민간부문 거래의 대부분이 미국 달러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태국과 베트남 국경 지역에서는 태국 화폐와 월남 화폐 및 미국 달러화가 캄보디아 화폐와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경제성장을 위한 재정과 금융부문의 역할은 미흡한 상황이다.
Ⅳ. 경제 현황
주캄보디아대한민국대사관 캄보디아 경제개황. 2009
주캄보디아대한민국대사관 캄보디아 경제개황.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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