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운동 과정과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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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54 운동 과정과 발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파리회의에서 중국이 실패했다는 소식이 1919년 4월말 북경에 전해지자, 新潮社·國民雜誌社·工學會·同言社·共學會 등의 학생단체들은 대회를 열어,21개조 요구에서 일본이 제시한 최후통첩의 4주년 기념일인 5월7일 국치기념일에 집단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북경대학, 고등사범학교, 고등공업학교, 법정전문학교의 주도하에 북경의 모든 대학, 전문학교 학생단 으로부터 이 데모결의와 전학생의 참여계획이 승인을 얻었다. 북경의 학생들은 대회를 열어, 국치 기념일인 5월 7일 집단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고, 학생들은 민족의 이익을 위한 정치투쟁을 선언하고, 언론, 정치단체, 상회를 향하여 일제히 분기하여 호응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런 압력에 대하여 북경정부는 소동을 진정하려는 과격한 조처를 취함으로서 더욱 민중의 분노를 샀다. 북경의 학생들은 본래의 계획보다 앞당겨 예정된 집단시위를 벌이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일단의 적극적인 학생들은 긴급사태를 고려하여, 5월 3일 오후 1시 북경대학에 공시하여 북경의 모든 대학·전문학교 학생대표들의 임시회의를 요청했다. 임시회의는 그날 저녁 7시 북경대학 법과 강당에서 개최되어 1천여 명의 학생들이 참석했다. 회의는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고, 대다수 학생들과 학생대표들은 데모에서 폭력을 쓸 의향이 없었다. 회의는 주로 新潮社와 國民雜誌社 회원들에 의해 지도되었는데, 그들은 대개 처음부터 폭력행동을 부인했다. 그러나 일부 급진그룹은 데모를 질서 있는 단순한 항의 이상의 것으로 전환시키려고 계획했다. 5월 3일 저녁 학생그룹들은 각자의 학교에서 회의를 열고, 다가오는 데모의 방법과 절차를 토의했다. 그 회의에서 어떤 그룹들은 북경 정권에서 가장 친일관료 3인, 曹汝霖·章宗祥·陸宗輿를 공격하기로 계획했다. 이들 그룹들은 비밀의 누설을 두려워했으므로 5월 3일의 임시회의에서 예정보다 3일 더 일찍 데모를 실행하기로 학생들을 설득했다. 데모날짜를 변경한 5월 3일의 학생들의 결의가 북경대학 행정당국자들에게 알려졌다. 이 학생회의에 앞서 蔡元培는 교직원 회의를 소집하여 학생활동 문제를 토의했었다. 대학에 대한 군벌정부의 적대적 태도와 중일간의 쟁점에 있어 정부의 연약한 입장에 대한 그들 자신의 분노 때문에, 교직원들은 학생활동은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5월 4일 일요일 아침 10시 학생대표들은 전날 저녁 회의에서 예정된 대로 북경 法政전문학교에서 회합했다. 북경대학을 포함한 13개 전문학교·대학의 학생대표들이 참석했다. 육군학교도 입회자로서 학생대표들을 보냈다. 약 1시간 반 계속된 이 회의에서 5개 결의안이 채택되었으니, ①국내외의 모든 관련단체에 전보를 보내서, 파리강화회의의 山東결의안을 항의하도록 촉구할 것, ②전국도처의 인민대중을 각성시키도록 노력할 것, ③북경국민대회를 준비할 것, ④학생활동과 기타 단체들과의 관계를 담당하도록 전 북경학생들의 항구적이고 통일적인 조직을 설립할 것, ⑤오후의 데모노선은 天安門으로부터 공사관구역(東交民巷)을 거쳐, 崇文門大路를 통해 상업지구까지로 할 것 등이다. 이 회의에서 학생 대표들은 위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데 상당한 능률과 조화를 보였다.
오후 1시 30분까지는 3천여 명의 학생들이 데모에 참가하려고 天安門에 집결했는데, 북경의 13개 전문학교·대학을 대표했다. 이 날 북경대학 학생들이 제일 늦게 도착했었던 이유는 북경정부가 대회를 막으려고 경비병과 경관 몇 명을 동반한 교육부대표 한 명이 오전11시경 북경대학에 파견되어 蔡元培의 입석하여 학생들의 참가를 말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학생들을 잠시 지체시키는 데 그쳤다.
학생들이 天安門앞 대 광장에 집결하여 학교별로 무리를 지어 구경꾼에게 전단을 배포하는 한편 학생들은 데모의 목적과 감정을 표현하는 중국어·영어·불어로 된 구호와 만화들이 담긴 천이나 종이로 만든 백기를 휴대하며 天安門 남쪽으로 中華門을 거쳐 행진했다. 북경민중은 데모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많은 구경꾼들은 거리에 조용히 서서 학생들이 외치는 구호를 주의 깊게 경청하였으며 많은 서양인 구경꾼들도 그들에게 갈채를 보냈다. 학생들은 질서 있게 시가를 따라 행진했으며 소학교의 보이스카웃과 학생들이 가담해서 전단을 배포했다. 정부가 순찰 보낸 경찰과 첩보원들마저 학생 측이 폭력을 행사할 징조를 조금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분위기는 데모 후반기에 바뀌어 기율이 다소 무너졌다. 中華門을 지나 행렬은 동쪽으로 돌아서 공사관 구역의 서쪽 입구에 이르렀다. 학생들은 공사관구 경찰에 의해 치외법권 지구에의 입장을 거부당했다. 공사관 관리들과 전화 통화를 몇 차례 한 후, 羅家倫과 張國燾 등 학생대표 4명이 미국공사관에 들어가 공사를 면회하기로 했다. 공사가 부재중임을 알자 학생들은 공사에게 진정서를 남겨두었다. 또한 영국·프랑스·이탈리아 공사들이 부재중임을 알고 그들 공사관에 진정서를 남겼다. 두 시간여를 기다렸으나 공사관 구역을 통과하라는 공사관구 경찰의 허락을 얻지 못했으며 동시에 공사관구의 입구를 에워싼 중국군경이 난폭하게 개입하여 학생들을 강제로 퇴거시키려 했다. 이에 다른 시민들의 호응을 얻은 학생들은 겹친 실망과 압력 때문에 분격하게 되었다. 갑자기 그들은 ‘외교부로 가자!’, ‘매국노 집으로 가자!’고 외쳤다. 이 결정적 순간에 학생데모의 지도자로 뽑힌 傳斯年은 학우들을 말렸으나, 이 소란과 선동 속에 사태를 수습할 수는 없었다. 오후 4시 30분경 행렬은 외교부관사에 인접한 曹汝霖의 집에 이르렀다. 이때까지도 사태는 아직 제어하기 어려운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경찰이 취한 억압적 수단으로 데모대의 분노가 폭발하여 제어할 수 없는 폭력행위를 별안간 시작했던 것이다. 경찰·헌병이 학생들이 그가 왜 일본과 비밀협정을 맺었는지 설명하라는 요구에 아랑곳없이 학생들을 강제로 퇴거시키려 하자 격분한 데모대 중 다수가 돌과 백기를 창안으로, 담장 너머로 던지면서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썼으나 헛수고였다. 그들이 철수하여 귀교하려 할 즈음 비타협적인 학생 5명이 벽을 기어올라 창문을 깨뜨려 열고, 집안으로 뛰어들었다. 학생들은 친일관료 3명이 曹汝霖의 집안에서 비밀협의를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집 안에서 曹의 병든 아버지, 아들, 소첩을 빼고는 아무도 찾아낼 수 없었다. 학생들은 이들을 경호원과 함께 집에서 떠나게 했으며 소리치고 광란하면서 가구를 모두 때려 부수고 집을 불 질렀다. 사실 당시 曹汝霖는 章·丁·中江과 함께 집에 있었으나 하인 한 사람과 변장하여 탈출했었다.
이 후 학생들은 체포되었으며 계엄령이 공사관구 주변지역에 즉시 선포되었으며 이 사건은 즉시 수도 전체에 전파되어 중국의 정치·사회 각계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

정세는 상인기업가도시 노동자들이 학생들과 제휴함에 따라 5월 이후 점차 변동했다. 이러한 연합은 6월초 정부가 학생을 대거 체포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이루어졌다. 上海 및 기타 지역의 상인노동자 파업에서 이는 더욱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1) 정부와 학생의 타협 실패
동맹휴학에 당황한 북경 정부는 처음에는 작은 문제에 있어 학생들과 타협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정부는 일본의 반대를 야기하고 당시 집권중인 친일군벌에 손해를 줄 일이면 무엇이든 억제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태도에 학생들은 격분하였고, 이 시점에 일본인이 사태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5월 18,20,21일 중국주재 일본공사가 북경정부에 세 차례 항의를 하여 모든 학생의 배일활동을 진압하라고 요구하였다. 중국주둔 일본군의 무력시위가 곧이어 행해졌다. 이런 위협아래 북경정부는 무력으로 학생운동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처음 경찰총감 吳炳湘을 학생들에 동조한다고 해임하려다가, 北京總商會의 반대로 실패했다. 그러나 그 뒤 5월 21일에는 경찰총감 吳炳湘과 더불어 학생들에 동정적이라고 보수파의 의심을 받았던 步軍統領 李長泰가 해임되었고, 王懷鹿이 그 대신 임명되었다. 5월 23일 정부는 陳寶鍔가 편집하고, 그 후 天津으로 옮겨 잠시 동안 계속된 북경학생연합회의 신문 「五七日刊」과 그밖에 「救國」같은 학생 간행물을 탄압했다. 「進化」「工人寶鑑」「平安」「民聲」등 무정부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발행한 비 간행물들은 압수되었으며, 「益世報」「北京晨報」「京報」등 학생을 동조하던 신문 11종도 탄압되었다. 5월 25일 교육부는 모든 학생에게 3일 내로 복학하도록 명령했다. 한편 정부는 학생들을 다루기 위해 세 가지 방책을 계획하였다. 학교행정에 병력으로 간섭할 것, 학생조직들을 해체할 것, 학교에 경찰관을 파견하여 개별학생들에게 수업출석의 약속에 서명하도록 압력을 넣을 것 등이었다. 서명을 거부하는 학생들은 퇴학당하리라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수업을 재개하라는 명령을 무시했다. 그리고 북경의 교사들은 즉시 정부에 항의하여, 만일 정부가 그러한 과격수단을 취한다면 집단 사직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 압력에 대하여 정부는 전술을 완화하기로 하였다. 정부는 당분간 병력에 의한 간섭계획을 중지하기로 약속하고, 대신 교사들에게 학생들의 수업복귀를 설득하도록 요구했다. 교육부 관리들도 학생들과 협상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러나 이 긴장된 정세 속에 학생들을 분산시킬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정부는 끊임없이 학생들과 타협하려고 노력했고, 이러한 노력은 약간 효과가 있었다. 처음에 북경학생들은 그들의 활동에서 반일강연을 중시했고, 약 3천명이 매일 가두에서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그 뒤엔 일본과의 외교적 난국의 유발을 피하기 위해, 학생들은 대집단의 반일강연이란 전면적인 운동을 그만두고 개인이나 소집단의 학생들에 의한 강연과 국산품 구매권장으로 그 활동을 바꾸었다. 이 학생운동은 집중적이고 격렬했으나 아주 질서 있고 평온한 것이었다.
친일집단을 배경으로 하는 북경정부는 학생들의 열정이 외견상 조금 퇴조하는 듯하자, 이 운동을 강제 탄압하기로 하였다. 6월 1일 徐대총통은 두 가지 담화를 발표했다. 첫째는 曹陸章을 칭찬하여 민국에 공헌한 바가 많다는 것이고, 둘째는 학생들이 공공치안을 위태롭게 했다고 힐난하고 즉시 학교로 돌아가라고 훈계했다. 또한 학생연합회, 학생 의용대 같은 조직체는 탄압할 것이라고 공포했다. 계엄령이 수도에 포고되었다.
2) 6월 2,
참고문헌
< 참고문헌 >
任薰,중국공산당의「 창당과정-시대적 배경을 중심으로」(서울: 유림, 1983),p.83.
周策縱,「54운동」( 서울 : 광민사, 1980 ),pp.102-113
김정계 · 정차근 「중국정치론」( 서울: 평민, 1995 ),p88.
조영명,「중국 현대사의 재조명」( 청주 : 온누리, 1985 )p.66.
이렇게 5.4 운동의 발현의 양상 및 형태에 대해서 정리해보았다.
너무 객관적인 현상들을 조사하는 것이다 보니 내 의견이 많이 들어가지 못해서 아쉽다.
하지만 이렇게 일련의 사건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지식적인 공부도 되었고 또 느끼는 바도 있어서 좋았다.
우리나라도 광주학생운동이나 3.1.운동 때 이렇게 젊고 뜻있는 학생들이 뜻을 모아 이렇게 투쟁을 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득 그때의 중국과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은 자기 한 몸 보다는 나라와 민족과 정의를 위해 몸 바치며 투쟁했는데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그런 열정이 식어버린 것은 아닐까..너무 약해져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5.4 운동을 주도했던 중국학생들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