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사 연극은 메신저이다
연극은‘메신저’이다.
수업을 듣기 전에 가졌던 수업에 대한 기대는 ‘어떻게 글을 쓸 것인가?’ 즉, 극작을 위한 이론적 배경으로서 연극사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한 학기 내내 어떠한 형식에 맞춰 글을 써야 하는 지에 대한 해답 찾기는 계속 되었지만 수업이 거듭될수록 그 답은 더 모호해져만 갔다. 애초에 오늘날의 연극에서 ‘사조’를 구분한 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다. 지나간 연극사적 흐름을 시기별로, 사조별로 구분하여 내가 추구하는 연극이 어떤 것과 닮아있는지 비교하려는 시도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던 것이다. 현대 연극은 한 학기 동안 살펴본 모든 연극 사조에 일정부분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을 무대 위에 재현하는 예술로서의 연극은 본질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삶을 재현하겠는가?’에 대한 물음보다 ‘어떤 삶을 재현하겠는가?’에 대한 물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어떻게 글을 쓸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이전에 ‘어떤 글을 쓸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 연극은 특정한 형식으로 재현되어 지는 삶이 아니라, 특정한 삶을 통해 재현되어지는 형식인 것이다. 형식은 동시대의 인간 삶에 대한 진지한 통찰 그 이후의 문제이다.
오늘 날의 연극을 사조로 정의하자면 절충주의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일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데 목적을 두거나, 해체 그 자체에 목적을 둔 연극과 같이 다양한 형태의 연극이 있지만, 대부분의 연극은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그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모든 연극적 요소를 차용하고 있는 듯 보인다. 부조리와 서사극도 일상의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넓게는 사실주의적 요소를 포함한다고 가정한다면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을 가진다. 사실주의가 아직까지 현대 연극의 흐름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형식보다 삶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의 섬세한 결을 찾아내고 인간성의 감춰진 심층을 예민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 현대 연극의 사실주의적 극작법은 인간 삶의 단면을 의미심장하게 그려낸다는 점에서 TV드라마, 영화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연극과 TV드라마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것이 판타지를 내포하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한 전달매체가 무엇이냐의 문제이다. TV드라마, 영화는 그것을 통해 삶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대중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바를 대리만족 시켜줌으로서 그 관객의 판타지(Fantasy)가 완성되는 극적 구조를 전재로 한다. 이러한 판타지성은 연극적 환각(Illusion)과 유사 하다.미디어는 시청자의 눈에 덧대어진 요술경이 되어, 사람들의 눈앞에 신기루를 보여준다. 권선징악型 이야기나 신데렐라型 이야기와 같은 통속적 이야기를 통해 관객들은 연극에서 느끼지 못하는 색다른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연극은 무얼 해야 하는가? 어쩌면 이 것이 연극인에게 주어진 가장 큰 화두 일 것이다. 수업시간 내내 현대 연극이 시도했던 다양한 시도가 TV와 영화에게 빼앗긴 관객을 다시 극장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싸움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상징주의와 표현주의는 이미지를 통해, 극장주의는 공간성을 통해, 부조리극과 서사극은 비판적인 부정을 통해, 제의의 연극은 집단성을 통해서 미디어에 맞서 싸워왔다. 하지만 근근이 버티고는 있지만 이미 거대하게 성장해버린 미디어와의 싸움은 게릴라전 그 이상은 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연출가와 극작가 무기를 개발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싸움의 근본적인 원인을 망각했던 것이다. 상징주의와 표현주의는 어떻게 하면 ‘더 예쁘고 충격적인 그림을 무대 위에 그려낼 수 있을까?’를 찾기 위한 형식 연구에 심취한 나머지 소통의 부재라는 치명적 약점을 안게 되었고, 부조리극과 서사극은 일부 지식인들에게나 유용할 어려운 질문을 던지거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식하는 질문 - 삶은 부조리하고, 사회는 변화해야 한다 - 을 확인하고자 했으며, 언어를 부정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한 자체적 모순으로 인해 관객들을 혼란스럽게 했으며, 관객과의 게임을 통해 연극의 독재성을 탈피하고자 했던 극장주의는 게임에 있어서의 의도성, 과도한 게임으로 인한 지루함, 관객의 상상력을 제한하는데서 오는 관객의 수동화라는 한계를 드러냈다. 또 그 후에 집단적 체험을 통한 공동체성의 회복이라는 본능적 연극 형태를 통해 연극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았던 제의의 연극 흐름은 그것이 단지 실험을 위한 실험에 그침으로써 관객을 연극에서 점점 멀어지게 해왔다. 현대의 연극은 연극적인 것의 실험을 가장한 독재의 역사처럼 보인다. 더 이상 연극에서 카타르시스는 느끼기가 힘들다. 화려한 무대와 이해할 수 없는 몸짓으로 포장된 연극은 눈을 어지럽히고, 해체된 이야기는 정신을 어지럽힌다. 이러한 연극은 관객의 상상력을 통제하고 미화된 폭력으로 관객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시도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시도들이 인간의 삶에 새로운 형식의 질문을 던져주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질문이 인간 삶이 아닌 그 표현 방식을 위한 형식에만 치중해 연극을 본래의 연극에서 더 멀어지게 한 결과를 초래했다는 데 있다. 가장 연극적인 것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을 찾기 위한 접근으로서 연극 그 자체에 충실한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연출가나 극작가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대다수의 문제들은 외면한 채 새로운 형식 찾기에만 몰두한다. 더 이상 새로운 소재가 나오지 않는 시대임은 부정할 수 없다. 더 이상의 새로운 소재가 없다고 해서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않는 과거의 이야기를 새로운 형식의 틀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무모한 시도만 반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 연극은 메시지이다. 인간을 바라볼 때 혹은 사회를 바라볼 때 외치고 싶은 그 무언가가 바로 연극이고 작가의 메시지이다. 하지만 지금의 연극은 작가의 메시지보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에 관심을 기울인다. 사실주의냐 상징주의냐, 부조리극이냐 서사극이냐는 솔직히 말하면 중요하지 않다.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형식을 선택할 뿐이다. 연극사의 흐름에서 각각의 사조가 가졌던 문제의식의 출발점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것은 그 출발점이 형식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이었기 때문이다. 인간 실존의 문제나 소통에 대한 문제, 집단 무의식이나 집단적 체험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다양한 형태로 사회에 기생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끄집어내고 그것에 저항하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이다. 인간 대 인간, 인간 대 사회, 인간 대 절대적인 힘의 대립을 그려내는 것이 바로 극이다. 하지만 극작가는 침묵한다.
파편화된 사회는 인간에게 침묵을 강요한다. 침묵은 온갖 금기의 형태로 인간의 삶을 통제한다. 780년대의 저항정신은 21세기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듯 하다. 강요된 침묵 속에서 요즘의 사람들은 컴퓨터 앞으로 도망친다. 인간은 인터넷을 통해 해방된 자아를 발견하기도 하고, 스스로를 거대한 넷 속에 데이터베이스화시킨다. 인간은 부조리한 사회의 일부분으로써 실존하는 자아가 아니라, 거대한 퍼즐의 한 조각처럼 보인다. 침묵을 강요당한 관객은 억눌린 욕망을 분출하고 싶어 한다. 공동의 체험을 간절히 원한다. 이들은 현실이 아니라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세계에서 자신들 만의 문화를 만들고, 리플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 결국 인간은 더욱 파편화되어간다. 정작 제의적 기능 즉, 욕망의 분출과 정화로서의 카타르시스를 일으켜 줘야할 연극은 극장에서 까지 이들을 침묵하게 만든다. 연극은 이들을 침묵하게 만든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아니라 침묵하는 이들의 모습을 다양한 방식으로 재현하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그리고 관객에게 반성하기를 강요한다. 관객은 오히려 이들의 삼류 개그 프로그램의 말초적인 웃음에서, 싸구려 멜로영화의 최루성 울음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하지만 공허한 웃음과 울음일 뿐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연극인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다. 극작가는 신이 아니다. 하지만 극작가는 공유된 사건을 재구성하는 구성작가도 잘나온 인물사진을 찍는 사진가도 아니다. 상징과 추상을 무대라는 캔버스 위에 그려 넣는 화가도 아니다.
작가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 관객은 자신의 침묵을 깸으로 인해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월드컵의 함성을 기억해보라. 그들은 집단적 체험과 금기를 깨는 행위 - 붉은 색의 금기, 국기에 대한 경도, 집단적 행위에 대한 통제 등 - 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연극은 일종의 집단적 체험이다. 관객은 극장에 가는 행위를 통해서 현실에서 분리된다. 무대 위의 배우와 관객은 현실의 시간과 공간에서 동떨어진 그들만의 정서적 공유를 통해 스스로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것이 사실주의 연극이든 제의의 연극이든 무슨 상관인가? 침묵은 메시지를 통해 깨어진다. 극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관객과의 소통을 통해 울림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의 연극이 채팅 프로그램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NATE ON 이건 MSN 이건 상관없다.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로서의 채팅프로그램은 억눌린 자아를 해방시키기 위한 매개체 - 자신의 심정을 대변하거나 강요된 침묵을 깨는 수단(감정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 사회에 대한 개인의 반항과 집단적 공유에 의한 파급력 (개인성과 집단성) - 라는 의미에서 연극과 유사성을 띈다.
관객은 때때로 비겁할 수 있다. 스스로의 울림을 경계하거나 변화를 두려워할 지도 모른다. 관객의 비겁함을 이용하는 작가와 연출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관객이 불편하게 느끼더라도 그러한 불편함을 통해 현실에 대해 적극적으로 맞서야 한다. 작가는 결코 침묵해서는 안 된다. 투쟁해야 한다. ‘핫 미디어’도 ‘쿨 미디어’도 아닌 ‘웜 미디어’로서 절충적 극단주의가 필요하다. 작가는 메시지를 전달함에 있어 강요가 아닌 열린 사고방식으로 관객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연극의 형식에 대해 고민하기 보다는 연극의 본질적 기능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이다.
연극사의 흐름에서 볼 수 있듯이 현대의 연극은 언제나 사회적 문제점에의 대안으로서 다양한 인간의 존재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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