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동 사상을 중심으로
■ 들어가는 말
중국의 학문을 내학으로 삼고 서양의 학문을 외학으로 삼는다. 중국의 학문으로 심신을 닦고 서양의 학문으로 세상사에 대응한다. 모든 일에 대해 반드시 경전에서 근거를 찾을 필요는 없지만 경전을 뜻을 거스르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 성인의 마음가짐으로 성 인의 행동을 하고, 효제충신의 덕을 갖추어 군주를 받들고 백성을 비호하는 정치를 베푼 다면, 아침에 증기 기관차를 운전하고 저녁에 철로를 달려도 성인의 학도가 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장지동 「회통(會通)」외면 13 『권학편』
- 장지동 -
19세기 중기부터 중국은 서양 문화의 집중적인 세례를 받기 시작했다. 1840년 아편전쟁으로 중국은 서유럽 세력에 무기력하게 당하고 말았지만, 그것은 단순한 군사상의 패전이었다고 여길 뿐 그들의 우월성을 굳게 믿으며 서구의 모든 것을 비난했다. 그러나 1851년부터 14년간 이어진 태평천국운동 등을 통해 국내의 여러 변화와 서구의 (반란군을 진압하는) 군사력을 실감하자 중국은 비로소 서구 열강의 우수한 무기와 과학 기술력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로인해 양무운동의 기운이 움트게 되어, 군사산업 중심의 근대화에 힘쓰기 시작했다.
■ 양무운동
19세기 후반의 청나라는 더 이상 중국을 온전히 통치할만한 힘이 없었다. 태평천국운동이 전국을 휩쓸 때도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서구 열강의 압력에도 변변히 저항을 못하고 굴복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증국번, 이홍장 등 소수의 고위 관료들에게서 중국의 힘을 강화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서양의 근대 공업기술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그들이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서양의 군사기술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양무운동은 태평천국운동의 세력이 약화되고 있던 1860년대 초부터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는 1894년까지 계속된다. 양무운동은 보통 3단계로 구분한다. 제 1단계는 1860년~1872년까지의 시기로, 주로 군수공업 중심의 개혁이며, 제 2단계는 1872년~1885년까지로 조선관련, 근대적인 운수 통신시설, 전신부설 등이다. 제 3기는 1885년~1894년까지로 이홍장의 북양해군이 편성되고 장지동이 한양제철소를 건설하는 등 근대산업시설과 군사조직이 강화되었다. 안정애, 양정현 「한권으로 보는 중국사 100장면」
그러나 이들 양무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중국내의 정치 경제제도 등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그들의 목표는 근대 기술을 도입하여 전통적인 중국사회를 유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양무운동이 추구했던 군대의 전력을 강화하고 산업을 성장시켜 부강하고 안정된 중국은 청일전쟁에 패배하면서 그 노력을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 장지동
1837에 태어나 1909년에 생을 마감하였으며, 자는 효달(孝達)이다. 구이저우(귀주)성의 관료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 14세에 과거의 1차 시험인 향시에 합격하고 27세에 과거의 최종관문인 진사과에 급제했다. 탁월한 문학적 재능과 이로 인해 얻은 명성은 관리로 출세하는 바탕이 되었다. 그의 관료경력을 크게 보아 두 시기로 나누어진다. 1862년~1882년에는 학자교육행정가로 근무했고, 1882~1907년에는 지방관에서 점차 승진하여 중앙정부의 지도자가 되었다. 정치적으로 서태후를 지지했고, 서태후 또한 그를 빠르게 승진시켰다. 1882년 산시성 총독, 1884년에는 광기성, 광둥성 양광총독에 임명되었다. 1889년 호남, 호북 호광총독이 되어 18년 동안 이 직책을 맡다가 1907년 베이징으로 소환되어 내각총리대신 겸 대학사에 임명되었다.
장지동은 서양의 기술을 배척하지 않았으며 개혁의 중점을 서양의 기술에 두었다.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의 공업화에 착수하여 면방직공장, 견직물공장, 피혁공장, 철광이나 석탄의 채굴, 그리고 한양체철창을 설립했다. 난징에서 임시 총독으로 있을 때는 독일인 고문의 도움을 얻어 신식군대를 창설하였다.
로이드 E. 이스트만 『중국사회의 지속과 변화』
이철승 「근현대 중국 사상계의 문화 의식에 배태된 중화 사상」, 『오늘의 동양사상』제11호, 2004
이혜경, 『천하관과 근대화론 : 양계초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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