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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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 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율곡 이이
1. 율곡 이이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이다. 1536년(중종 31) 음력 12월 26일에 사헌부 감찰을 지낸 이원수(李元秀)와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의 셋째 아들로 외가가 있던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13세의 나이로 합격했으며, 조광조의 문인인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에게 학문을 배웠다.
29세에 문과에 장원하여 중앙의 요직과 지방의 외직의 경험으로 쌓은 식견과 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했다. 1576년에 동인과 서인의 대립이 심화되자 그의 중재 노력이 실패하고 건의한 개혁안마저 묵살되자 낙향하여 본가와 처가를 오가며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후학양성에 힘을 썼으며 향약과 사창법을 시행하였다.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으로 복직하여 각조의 판서 등 비중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 실시와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무렵 기자실기와 경연일기를 완성하고 왕에게 시무육조를 지어 바치고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으나 선조의 미온적인 태도로 그의 개혁안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동인·서인간의 대립의 격화로 동인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고 동인의 장악한 삼사의 핵탄으로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 집에서 별사했다.
율곡이 살았던 16세기 조선은 을사사화(1545)가 일어난 때였다. 정치적으로는 관리들이 무사 안일과 사리 사욕의 타성에 젖어 있었으며, 사림의 갈등과 알력이 노골화되고 동, 서 붕당으로 당쟁이 싹트기 시작하는 때였다. 15세기 말~ 16세기 중엽에 이르는 동안 관료층 사이의 대립에 따른 사화는 신진 사림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어 그들은 정치의 뜻을 버리고 산림에 숨어 학문 연구와 교육에 힘쓰는 경향으로 흘렀다. 후에 명종 말년부터 점차 중앙의 정치무대에 다시 진출하기 시작하였으며, 선조가 즉위하면서 신진 사림들이 중앙의 주요 관직에 대거 등용되어 확고한 정치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양반 관료 체제의 국가였으므로 양반 관료들 사이에 정권 장악을 위한 쟁투가 불가피했으며 대립 뿐만 아니라 분열 현상이 나타나게 되어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되어 당쟁을 시작하였다.
2. 성학십도와 성학집요
퇴계에게서 수기의 내용은 경 위주의 심학 및 심법, 즉 마음의 공부이다. 퇴계가 주자학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심학 또는 심법이라는 용어를 종종 사용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누구보다도, 인간의 삶에 있어서 마음(공부)의 힘과 역할을 중요시 한다. 마음은 개인과 사회, 나아가 국가적 차원의 모든 현실의 창조적 원천이다.
퇴계는 모든 현실의 창조의 원천으로서의 마음의 중요성을, 당대의 일상적 삶과 정치를 체험하면서 절감했다. 당시의 잦은 사화를 비롯한 정치적 갈등, 민생의 어려움은 비단 정책 및 전략의 부재 이전에, 정치인 및 지식인들의 마음이 크고 작은 어긋남의 싹을 지니는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표면적으로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지만, 어떤 정치적 행위 속에는, 그 행위자 자신도 크게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는, 크고 작은 행위자의 사욕이 개입되어 있기 쉽다. 그런데 아무리 작은 사욕이라도 그것이 내재해 있는 한 그것은 결국 거대한 파도가 되어 정치를 파탄으로 몰고 가는 원천이 됨을 퇴계는 잘 관찰하고 있었다. 한 국가를 이끄는 정치인들이나 지식인들의 마음은, 일반인들의 마음과는 달리, 보다 큰 범위의 현실 창조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마음이 잘못되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삶만을 파괴할 뿐 아니라 사회와 국가 단위에서의 많은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따라서 정치적 삶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라면 더욱이 마음을 순수화, 가치화, 이화시킬 필요가 있다. 퇴계와 율곡의 공부론 비교 연구 - 『성학십도(聖學十圖)』와『성학집요(聖學輯要)』를 중심으로, p.211
퇴계에게 있어 수기의 목표는 기의 상황이나 작용과는 관계없이 언제나 리를 드러낼 수 있는 마음을 갖추는 일이다. 온전한 수기를 통해 마음이 리의 지평에서 굳건하게 발딛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가정, 사회, 국가에서의 역할은 결코 정도를 벗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퇴계의 생각이다.
율곡의 경우는, 수기를 근본으로 인식한다는 점, 그래서 수기의 완성을 근간으로 치인의 역량을 확충해가야 한다고 보는 점에 있어서 퇴계와 일치를 보인다. 수기는 치인의 바탕이 되고 치인은 수기의 확장이 된다는 생각은 퇴계나 율곡이나 공통적으로 지니는 것이다. 율곡은 퇴계와는 달리 수기로부터의 치인의 상대적 독립성에 주목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율곡은 성인됨의 공부를 논하는 『성학집요』에서, 방대한 분량을 할애하여 치인의 문제를 섬세하게 다룬다. 공부의 문제가 수인과 치인의 영역을 동시에 포괄하고 있다는 것이다. 퇴계와 율곡의 공부론 비교 연구 - 『성학십도(聖學十圖)』와『성학집요(聖學輯要)』를 중심으로, p.211~212
율곡은 수기가 근본이며, 수기가 준비되지 않으면 치인 역시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치인은 수기와는 다른 그 나름의 독특한 전개논리가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치인은 분명 마음과 몸을 단속하고 궁리하며, 일상적 인간관계 및 일 처리를 이치에 맞게 하는 등의 수기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그러나 치인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마음과 일상생활과 연관되는 영역으로서의 수기와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복잡한 사회구성원이나 집단 간의 존재양식 및 역학관계를 반영하는 고유의 실천 양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치인의 역량을 갖추기 위해서는 단지 수기 공부에만 치중해서는 안 되고, 수기 공부와는 일정 정도 구분되는 ‘특별한’ 별도의 공부가 필요하게 된다. 퇴계와 율곡의 공부론 비교 연구 - 『성학십도(聖學十圖)』와『성학집요(聖學輯要)』를 중심으로, p.213~214
율곡은 퇴계에 비해서 현실주의적 눈을 지니고 있다. 율곡의 눈에는 복잡다단한 정치, 경제 현실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비추어진다. 마치 착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해서 정치 · 사회 · 경제적 문제의 이해와 해결의 안목이 밝은 것이 아닌 것처럼, 수기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치인의 능력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율곡은 치인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수기가 근본이 되어야 하지만, 수기가 근본이 된다고 해도 치인이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역사를 통해서 분명하게 확인한다. 퇴계와 비교한다면 율곡은 치인과 관련한 수기의 힘에 대한 믿음이 덜하다. 그렇다면 수기와 치인에서 모두 성공하기 위한 해법은 자명해진다. 수기는 수기 나름대로 이루어가되, 필요한 치인의 역량을 갖추는 공부를 행하는 것이다. 치인의 역량을 갖추는 일에는, 치인의 근본 원리를 관철하는 힘과 지혜를 구비하는 일에서부터, 각종 제도와 문물을 이해하고 관련 문제를 해결해가는 능력을 쌓는 일까지 포괄되어 있다. 퇴계와 율곡의 공부론 비교 연구 - 『성학십도(聖學十圖)』와『성학집요(聖學輯要)』를 중심으로, p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