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는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Ⅰ. 서론
Ⅱ. 본론
1. ‘귀주대첩’의 내용과 사건 이후의 사회 변화
2. ‘일제 강점기’의 내용과 사건 이후의 사회 변화
Ⅲ. 결론
Ⅳ. 참고문헌
Ⅰ. 서론
우리나라에서는 끊임없는 외세로부터의 침략을 받아왔으며 또 극복해 왔다. 이번 과제를 통해서 우리나라가 외세로부터의 침략을 받은 원인이 무엇이고, 또 어떠한 식으로의 침략을 받았으며 또 극복해서 왔는지 조사하고 작성을 해보려고 한다.
Ⅱ. 본론
1. ‘귀주대첩’의 내용과 사건 이후의 사회 변화
1019년에 강감찬이 중심이 되어서 고려를 침입을 했던 거란군을 귀주에서 무찌른 전투를 말한다.
993년 겨울과 1010년의 11월에 고려를 침입을 했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지 못한 거란은 1018년의 12월에 또 다시 고려를 침공을 하였다. 소배압을 총책임자인 도통으로 삼아서 고려를 치게 한 것이다. 이것에 현종은 강감찬을 총지휘관인 상원수로써,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았다. 현종은 이사람들에게 약 20만 8천 3백의 병력을 주며, 거느리고 가 거란병을 막게끔 했다.
고려 침입을 했던 거란에서의 군사들이 흥화진에 이르게 되자, 강감찬은 기병 1만 2천 명을 선발을 하여 산중에 매복을 시키고 소가죽을 엮어서 흥화진의 동쪽을 둘러 싼 큰 내인 삼교천을 막았다. 거란병은 흥화진을 직접적으로 공격을 하는 것보다는 우회를 하여 진격을 하는 쪽으로 작전을 세웠던 듯하다. 그러나 고려군은 이와 같은 생각을 간파하고 우회로 상에서 수공작전을 사용을 했다. 고려군은 상류를 막아서 거란병이 강을 건널수 있도록 유도를 하고 이들이 함정에 빠지게 되자, 막았던 물을 터뜨려서 거란병의 대열을 붕괴를 시켰다. 그리고 숨겨두었던 병사들로 전력이 붕괴되어진 기습을 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거란은 고려군에서의 전술에 패하였지만, 이것에 굴하지 않고 바로 개경으로 향했다. 이는 삼교천의 전투 이후 청천강 이북 지역에서의 전투관련 기록이 보여지지 않는 사실을 통해서 추정을 할 수 있다. 아마도 현종의 항복을 받아내게 되면 전쟁에서 이긴다고 생각을 했었던 듯하다. 강민첨은 소배압에서의 부대를 추격하여 자주의 내구산에서 크게 격파를 하고, 조원도 마탄에서 1만 가까이의 거란병을 살해를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거란이 이어지는 패배에도 물러나지 않으며 개경으로 진군해 오게 되자, 고려는 위기감을 느끼고 태조의 재궁 즉, 관을 지금의 삼각산으로 추정이 되는 부아산의 향림사로 옮겨 안치를 하고, 개경 일대를 계엄 상태로 두었다. 강감찬은 김종현에게 병사 1만을 주어 밤낮으로 달려가서 수도인 개경을 보호를 하게 하였고, 동북면병마사가 3천 3백 명의 지원병을 보내왔었다. 개경의 방어를 위한 강화책인 셈이다.
1019년의 정월에 소배압은 개경 백 리 거리에 위치를 한 신은현까지 침입을 해 왔다. 현종은 성 밖에서의 민호를 전부 성 안으로 철수하게 하며, 들판의 곡식 등을 모두 제거를 하는 청야작전을 펴며 거란병을 기다렸다. 소배압은 야율호덕을 보내어서 서신을 가지고 통덕문에 이르러 군사를 돌이킨다라고 알리는 한편으론, 몰래 기병 3백여 명을 보내서 황해도 강음의 금교역의 방면으로 보냈다. 그러나, 이들은 거꾸로 밤을 틈 타서 공격한 고려 군사 1백 명에게 살해를 당하고 말았다.
개경 공격이 여의치가 않게 되자, 부담을 느낀 거란은 위주와 연주로 방향을 바꾸었다. 강감찬은 거란병이 이곳에 이르렀을 때에 공격을 하여 적병 5백 명을 살해하였다. 소배압은 고려와의 전투에서 계속 패하게 되자, 결국에 철군을 결정하였다. 같은 해의 2월에 거란병은 철수하는 과정에서 귀주를 지나가야만 했었다. 귀주는 현재의 평안북도 구성시의 일대를 가리킨다. 귀주의 일대는 4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태로 되어 있으며 귀주를 통과를 하는 도로는 좁고 험한 계곡 사이에 형성되어져 있어서, 적을 막기에 좋은 길목이었던 것이다.
강감찬이 거느렸던 고려군은 귀주의 동쪽 교외에서 거란병과 대치를 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서로 팽팽하였던 상황은 김종현이 거느린 고려들의 원병이 도착을 하면서 고려 쪽으로 승기가 기울기 시작했다. 때마침에 비바람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와서 깃발이 나부끼며 북쪽을 가리킨 것이 고려군의 사기를 진작을 시켰다. 사기가 오른 고려군으로의 공격에 거란병들은 북쪽으로 퇴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군은 거란병에 대한 총공세를 취하였었는데, 석천을 건너서 반령으로까지 전투가 이어지면서 거란병의 시체는 들에 널려있을 정도였고, 고려가 생포한 거란인 포로와 얻은 말과 갑옷, 투구 등등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www.history.go.kr)
- 엄찬호, 역사와 치유 : 한국현대사의 트라우마를 중심으로,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1.
- 안지영, 일본침략 및 강점기에 대한 주변국들의 역사인식 : 한국, 중국, 대만 고등학교 역사교과서를 중심으로, 한국역사교육학회, 2011.
- 김만호, 강감찬과 귀주대첩, 한국중세사학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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