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트만은 “하나님에 관하여”(von Gott)와 “하나님에 대하여”(uber Gott)을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가 의미하는 바는 인간이 객관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없고 실존적인 관점에서만 그 진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사양하셨다. 그 나라, 바로 그분은 우리의 인식이나 표현 양식안에 들어올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말하는 신 진술은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아니라 일종의 개념, 즉 ’하나님의 세계 관계성에 대한 개념적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속의 하나님을 우리의 언어로 말한다는 것은 극히 세속성을 가지게됨을 전제로 함을 의미한다. 세속성은 영원성과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가리킨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실행하는 모든 일들은 잠정적인 성격을 갖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이 말은 전통적으로 그리스도 교회가 이 세상보다는 저 세상, 그리고 그 영원성을 강조하는 것과 대립되어 있다. 이것은 종교적인 것과는 대립되는 그 무엇,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인간의 이성적인 기능과 통찰력을 기초로 하여 인간의 삶을 확정한다는 말이다. 계몽주의 이후로 인간이 자율은 그 중요성이 현저하게 상승하였다. 특히 물리학을 중심으로 한 자연과학은 이러한 인간의 자율적 사고에 의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율적 인간성에 대한 세속적인 인간 이해는 인간이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자율적인 인간성이다. 인간이 최고의 가치를 갖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여 그 외의 것을 상대화시킨다. 이에 해당하는 이들은 사르트르와 실존주의자들과 휴머니스트들이라 할 수 있다. 폴틸리히는 인간은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첫째는 자율적 인간(autonomy),둘째는 타율적 인간(heteronomy), 셋째는 신율 적인 인간(theolomy)이다. 물론 틸리히는 신율적 인간을 그리스도적인 인간 이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세속성이 때로 반기독교적인 형식으로 드러난다 해도 그리스도 교회는 이 세계를 부정하거나 도피할 수 없다. 여러 형식의 세속주의는 기독교가 간과했던 이 세상성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들과의 대화를 부단히 유지시켜야만 한다. 그렇다고 교회가 세상 속에 매몰될 필요가 없으며, 그렇게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신앙하는 하나님을 세상 적인 언어로 진술할 준비를 해야 하며, 그럴 때만 우리는 그리스도 교회가 전통적인 도그마로 간직한 “경륜적 삼위일체”에 충실한 교회로 남을 것이다. 요3:16절에 기록되었듯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

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