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선언
프리드리히 엥겔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함께 쓴 공산당선언은 19세기 중엽의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등장했다. 세상에 나온 시기가 유럽 곳곳에서 격렬한 반란과 봉기가 발생하던 때였다. 오늘날에도 적잖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용어가 반복해서 등장하고, 사회경제적 변화를 다루며, 자본주의 발전의 문제점을 제기하는 모습이 강렬해 보인다. 그 근본적 메시지에 공감하든 그렇지 않든, 이 책이 문헌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앞부분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령에 빗대며 특정 사상을 설명한다. 그 표현이 색다르면서도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갔을 것 같다. 생소한 사상이 퍼져나가는 현장을 묘사하기 위해 유령이라는 비유를 쓴 것은 설득력 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처음 부분을 넘어서면 곧 계급투쟁이라는 주제가 핵심으로 제시된다. 두 저자는 역사를 계급 간 대립의 연속으로 본다. 영주와 농노 사이의 갈등, 수공업자와 봉건 귀족의 마찰, 여러 형태로 이어져 왔다는 의견을 펼친다. 결국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모순이 절정에 달한 상태라고 진단한다. 실제로 19세기 유럽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기술이 빠르게 발전했고, 새로운 형태의 산업자본가가 등장하는 시기였다. 농업 중심 사회가 빠른 속도로 변했고, 기존의 신분질서가 조금씩 흔들렸다. 이런 변화 속에서 자본과 노동 간의 갈등이 한층 두드러졌다고 한다. 그 갈등을 규명하고 대안을 말하고자 한 책이 공산당선언이라는 해석이 많다.
이 책에서는 개인의 이익만을 중시하는 태도와 사유재산 제도에 대한 근원적 문제 제기가 나온다. 부르주아가 어떻게 기존의 봉건 잔재를 걷어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모순이 탄생했는지 짚는다. 봉건 영주와 왕실의 권위가 무너지고, 시민 계급이 새로운 주인공으로 부상했으나, 노동자들은 그 안에서도 가혹한 조건을 겪었다고 지적한다. 노동력 착취와 임금노동의 제도가 사람을 소외시킨다고 보았다. 이런 전개를 읽으면 과연 당시 노동자들의 생활이 얼마나 열악했을지 상상하게 된다. 공장 지대가 형성되고, 기계 생산이 늘면서 일정한 임금을 받고 하루 대부분을 일해야 했던 군중이 대거 등장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 대중을 하나의 세력으로 바라보며, 역사의 진보를 이끌어갈 동력으로 여긴다.
본문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에 대한 오해를 풀고자 하는 시도도 보인다. 모든 개인 재산을 부정하는 극단적 시각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존엄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면 어떤 방법이 필요한지라는 문제를 깊이 있게 질문하려 했다고 느껴진다. 당대에는 급진적 색깔이 강한 주장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여러 나라에서 동일한 흐름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자본주의가 확장할수록 계급차가 심해지고, 결국 대다수 노동자는 자본 소유자에게 예속된 상태로 남게 될 것이라는 경고다. 그 경고가 현실로 드러났는지, 아니면 수정된 방향으로 나아갔는지는 독자마다 다른 평가를 내릴 수도 있다. 다만 역사적 경험 속에서 적잖은 계급투쟁 사례가 있었다. 그 지점을 고려하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읽어낸 시대정신과 예측력이 무시하기 어렵다고 본다.
읽는 과정에서 문체가 간결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장황한 설명보다는 핵심을 직설적으로 풀어가는 편이다. 어떤 이는 그 간결함 덕분에 더 강렬한 느낌이 든다고 말하기도 한다. 경제적 용어와 현실 생활이 맞물려 있는 내용이어서 진부하게만 여겨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저자들이 사용한 비유나 과감한 표현도 눈에 띈다. 혁명으로의 전환을 촉구하는 장면에서는 인과관계와 당위성을 단호하게 제시한다. 그 전개가 논쟁적이지만, 오히려 그 점 때문에 기억에 오래 남는다. 이 책이 당대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이유도 그 직설적 선동에 있다고 본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느냐 묻는다면, 답은 개인마다 다르다. 예를 들어, 자유시장경제 체제가 현실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나라별로 특징적인 정치·사회 구조가 존재한다. 게다가 공산주의 운동이 여러 가지 경로로 전개되면서 예상치 못한 폭력과 억압이 벌어졌다는 역사적 사실도 있다. 그러므로 저자들이 제시한 아이디어가 완벽하다거나, 모든 문제의 해답이라는 말은 어렵다. 다만 19세기의 산업화가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뒤바꿨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몇몇 사상가가 어떤 문제를 포착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읽는 일은 의미가 크다.
계급의식이라는 말이 책 전체의 흐름을 관통한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구조적 긴장 속에서 살아간다는 주장을 펼친다. 더는 피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조직적 움직임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가까운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무리 개인이 성실히 일해도 커다란 자본이 집중된 소수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이 보인다. 그에 맞서 세상을 바꾸려면, 노동자들이 스스로 깨어나야 한다는 외침으로 이어진다. 그 외침이 흥미로우면서도, 조금은 위험스러운 기운을 풍기는 점도 있다. 모든 걸 뒤엎고 난 다음 세상은 어떻게 될지 구체적으로 묘사되진 않는다. 그 점이야말로 이 책을 둘러싼 영원한 논쟁 거리이기도 하다.
청년기에 한 번씩 접해보면 좋을 고전으로 꼽히는 경우가 많다. 강렬한 어조와 짧은 분량 덕분에 재미있게 읽히는 편이라서다. 그러나 이해 과정에서 당대 역사와 맥락을 아예 모르고 읽으면, 과장과 급진적 열망만 앞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최소한 산업혁명 시기에 벌어진 여러 사건이나 봉건 잔재가 아직 남아있던 사회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알고 접근하면 훨씬 더 다채로운 각도를 얻을 수 있다. 저자들이 절실히 바라본 근본적 변혁의 의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아직 왕과 귀족이 권력을 꽉 쥔 사회에서 시민권을 쟁취해야 했고, 시장 경제가 급격히 성장하자 새로운 희생자가 생겨났다. 이런 사정이 배경으로 있다는 사실을 알면, 왜 그토록 극단적 주장이 등장했는지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
본론에서 부르주아가 가진 생산수단 장악을 어떻게 없앨 것인가 라는 질문이 지속적으로 제기된다. 사유재산이 인간을 구속한다는 견해가 강력히 드러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미 생산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해왔기 때문에, 그 방향을 공동체가 함께 계획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희망을 말한다. 그 비전은 다양한 논란을 낳았다. 국가가 모든 걸 관리하면 개인의 자유가 제한되는 것 아니냐, 생산수단의 소유가 공유화되면 기술 개발이나 경제 발전이 주춤하지 않겠느냐 등의 반론이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도 거대한 중앙집권적 체제가 비민주적 결과를 초래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로서는 새로운 해방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졌던 듯하다.
읽어 내려가다 보면, 문장이 직접적 충돌과 전복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이에게는 그게 혁명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또 다른 누군가는 폭력적 혼란을 예찬하는 위험한 태도로 느낄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실제 혁명 과정에서 피가 흘렀다는 점을 떠올리면, 여기에 제시된 주장이 얼마나 급진적이었는지 실감하게 된다. 물론 모든 것이 힘으로 쟁취되었다고 해석하는 시각에는 반론도 존재한다. 오히려 부르주아 계층도 과거 권력층과 맞섰고, 상공업 발달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다고 반박한다. 그렇지만 저자들이 말하고 싶었던 핵심 주제는 소수에게 집중된 부가 전체를 속박하는 구조가 제거되지 않으면, 영원히 대다수는 착취당한다는 메시지에 가까워 보인다.
대부분의 페이지에서 읽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는 느낌이다. “왜 지금의 체제가 공정하다고 믿나?”, “왜 자본가가 모든 이윤을 가져가며, 노동자는 극히 적은 몫만을 가지는가?” 등의 의문이 등장한다. 그런 의문은 오늘날에도 유효할 수 있다. 기술과 자본의 결합이 갈수록 거대 기업과 소수 투자자에게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고, 다수는 제한된 기회를 둘러싸고 경쟁하는 현실이 벌어지기도 한다. 게다가 격차가 커지고 임금 상승률이 낮아지는 추세를 보면, 이 책에서 말한 상황이 완전히 낯설진 않다. 물론 예전에 비해 노동자 보호 제도가 보강되었다거나, 복지 정책이 확대되어온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불평등 문제가 완벽히 해소된 건 아니라는 반론이 계속 존재한다. 이런 맥락에서, 공산당선언에 담긴 급진적 해법을 부분적으로라도 다시 상기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곤 한다.
저자의 논리 흐름을 꼼꼼히 추적하다가 중간쯤에서 잠시 머뭇거리게 될 때가 있다. 실제로 생산수단을 완전히 공유하는 체제가 가능할까, 공유체가 개인의 창의력과 자유를 옥죄는 방향으로 흐르진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그런 고민은 전혀 다른 종류의 사회운동가에게도 공통적으로 일어난다. 자본주의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제도 개혁 방안을 생각해보려 해도, 근원적 대안은 쉽사리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혁명이 정말로 효과적일지, 아니면 다른 형태의 제3의 길이 있을지, 그것은 지난 200년도 넘는 기간 동안 많은 학자와 정치인이 골몰했던 커다란 수수께끼처럼 보인다.
읽는 동안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는 사회 변동 과정을 함께 떠올리게 되었다. 가령 중세 시절에는 대다수 사람이 농업에 종사했고, 신분제 사회가 굳게 자리 잡았기에 경제적 계층 이동이 매우 어려웠다. 부르주아 계층이 성장하면서 도시가 발전했고, 혁신적 기술과 새로운 사상도 등장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노동자는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을 얻었나 묻는다면, 반드시 그렇다고만 보긴 힘들었을 것이다. 기계화로 인해 일자리가 줄고, 공장주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노동력을 헐값에 샀다는 사례가 많았다. 그러니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말했듯, 그 발전이 희망이자 절망을 동시에 몰고 왔다고 볼 수 있다. 번영의 그늘 아래에서 더 큰 박탈이 벌어졌다고 주장하는 부분이 이 책의 핵심 메시지 중 하나다.
책 후반부에서 세계 혁명을 향한 열망이 드러나는데, 한 나라만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자본주의는 국경을 넘어 확장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자본이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면 노동력 착취 구조가 전 지구적으로 확산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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