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한국근대]현실주의자 이완용
2.친일파 매국노
3.현실주의자 이완용
하지만 이완용에 대해서 알아 가면 갈수록 그를 단순히 ‘매국노’라고 표현하기에는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인 시각이 실려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는 민족주의적 사회인식이 팽배했고, 마녀사냥적 희생양으로 이완용이 낙점되지 않았나하는 어찌 보면 ‘비민족주의적’ 시각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러일전쟁 이전의 이완용은 명백히 친미파였고, 친러파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자주적 근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든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속에서 관료를 비롯한 정치세력들은 열강의 힘에 기대어 정치권력을 유지하거나 근대화를 추진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우리나라만의 자주를 주장하던 인물은 극히 드물었으며 이완용 역시 온건개화파로서 미국과 러시아의 힘에 기대어 조선을 근대화하고자 노력했었다. 실제로 그가 갑오경장 당시 학부대신으로 재직하면서 진행했던 학교 개혁은 우리나라 근대교육에서 지울 수 없는 공로이다. 그는 미국에 참찬관으로 재직하면서 미국의 위대함에 경도되었고 이 후에 미국의 힘에 의지하려 했고,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하고 미국이 조선 문제에서 물러나자 일본의 세력을 이용하려 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완용은 스스로 현실에 영합하며 현실주의적인 면모를 인정한다. 정부의 고위관료이자 세계를 경험하고 온 그는 조선이 처한 현실 문제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시각각으로 조선을 압박해 오는 일본의 야욕에 대해 저항할 힘도 없었을 뿐더러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다. 당시 이완용이 아닌 그 누가 이완용의 지위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이완용과 같은 선택의 길을 걸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실로 제국주의적 논리가 통용되던 당시의 조선은 일본이 아니더라도 누구의 손아귀에 넘어가기 적합한 ‘후진적인’ 국가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변명은 이완용이 일진회와 경쟁하듯이 자발적으로 조선을 일본에 병합하려는 제안을 했다는 사실 때문이라도 이완용을 변호해 주지는 못한다. 다만 한때는 민족의 독립심을 고취하고자 창설한 독립협회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고, 한 평생 조선 황실에게 충성하면서 고종과 순종에게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으며, 친일파 치고는 평생토록 일본어를 구사할 줄 몰랐던 이완용의 생애를 돌이켜 보면 거부할 수 없는 불가피한 현실에 수동적으로 순응했던 전례들과 비교해서 한일합방 제안은 극히 이례적이라고 할 만한 행적이었으나 동시에 가장 극악하고 경악스러운 행적이었기에 그를 “단순한 매국노”가 아니라 “소극적 현실주의자로서의 매국노”라고 우회적으로 옹호하고 싶다. 사족으로 아직까지도 외세의 힘에 기대어 권력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정치가들이 판을 치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만약 우리나라가 독립을 하지 못하고 완전히 ‘내선일체’가 되었다면 이완용도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으로 평가받고 있지 않을까라는 ‘발칙한’ 상상도 해본다.
● 윤덕한, 이완용 평전, 1999, 중심
● 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란 무엇인가, 1997, 아세아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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