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론
※역사의 흐름으로 본 무(巫)와 유교
※제사,고사&제사,굿
※축제&굿판
※상장례로 알아본 巫와 儒
※巫 에 관하여...
♤맺음말
☆참고 문헌☆
☆참고 사이트☆
※역사의 흐름으로 본 무(巫)와 유교
먼저, 고조선 사회에서 삼국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는 고신교(古神敎)로서의 무(巫)가 신봉되었다. 그 기반 위에 유교가 이 땅에 들어와 정착하였다. 이 종교는 일정한 토착화의 과정을 거친 후 사회에 두루 신앙되면서 정치․경제․사회․예술 등 전반에 걸쳐 우리 문화의 형성에 이바지했다.
삼국시대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유교가 수입된 이래 이들이 전통의 무(巫)와 더불어 공존을 연출하였다. 성리학 전횡의 조선조만 하더라도 무는 억압과 천대 속에서도 존재하여 신앙되었다.
고려조를 일러 흔히 불교시대라 하는 것은 잘못이다. 유교․도교․무가 불교와 함께 사회에 신앙되었고, 그 시대의 문화를 감당하고 있었다. 불교가 성행했고, 유학의 소양을 가진 이들이 관료층을 형성하였으며 무․도교는 왕실과 민간에 두루 신앙되었다. 고승들이 유교나 도교의 소양을 갖추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
조선왕조에 들어서면서 그 사정이 급전한다. 유교의 성리학이 정치 이념으로 대두되면서 무(巫)는 갖은 억압을 감내한다.
다른 종교, 특히 무의 탄압과 관련하여 양반 관료층은 왕조 초기로부터 실로 교묘한 전략을 구사하였다. 사제․예언․치병 등 무의 기능 때문에 왕실조차 나라무당[國巫]을 두고 이 전통 종교를 신봉하였던 것인데, 양반 관료들은 이를 혹세무민이요, 음사(淫祀)라 하여 극구 반대하였다. 이들은 무를 한꺼번에 없애고자 하지 않고 금무(禁巫)의 여러 방책을 부단하고도 질기게 마련하고는 왕으로 조르고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금무의 법들이 내려지곤 했지만 제대로 지켜지는 일은 없었다. 무당을 고작 성밖으로 내쫓는 축출령이 역대로 끊임없이 공포되는 형편이었다.
양반관료층은
趙興胤,(2002),서울:東文選
柳東植,(1975),연세대학교출판부
최준식,(1995),서울:한울
☆참고 사이트☆
http://4444.tv/1_18.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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