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적답사] 조선 시대의 강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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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적답사] 조선 시대의 강화도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들어가는 말
조선왕실의 요새 강화도
정족산 사고
외규장각
인조의 피난처
강화도와 강화학파
맺음말

본문내용
들어가는 말


강화도는 한반도에서 제주도, 거제도, 진도, 다음으로 4번째로 큰 섬이다. 강화도는 본 섬과 교동도, 석모도의 큰 섬 세 개와 동검도 등 작은 섬 10여개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강화도 섬 내에는 여러 개의 산봉우리가 있지만 모두 해발 400m내외로 오르기가 쉽다.
그리고 한강 입구에 넓은 갯벌을 갖추고 있는 섬으로 유사 이래 그 중요성이 부각되어 왔다. 특히 단군 왕검시기에 이미 삼랑성과 참성단을 세웠다는 설화가 전해질 정도로 그 중요성은 일찍부터 강조되었다.
또한, 지형적인 특징으로 인해 교통의 요지가 되고 무역과 해양활동에 있어서도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내륙 가까이에 있는 강화도는 동쪽으로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의 하구가 되고 서쪽으로는 서해를 통해 중국과 연결된다. 바다로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하면서 조수간만의차에 따라 물길이 바뀌고 연안에는 갯벌이 있어 예로부터 접근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조선왕실의 요새 강화도


강화도가 한양의 방어뿐만 아니라 비상시 왕실과 정부의 피난처(보장처)로 선정되어 주목받게 된 것은 임진왜란을 겪은 후인 광해군 때부터이다. 광해군 즉위 직후부터 강화도가 국가 피난처로 갖추어져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리하여 강화도를 지키면 수도를 지키는 것이고 강화도를 잃으면 수도를 잃는 다는 의식이 생겼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강화도의 해변 요지에 목책을 설치하고 군비를 확보해놓는 등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광해군이 폐위된 후 친명배금정책을 표방하던 인조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약 70일간 강화도에 있으면서 난을 피할 수 있었다. 또한 병자호란 때 인조의 아들로 청의 침략을 피해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가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서 온갖 고초를 당했던 효종은 왕에 등극하자 강화도에 ‘만일’을 대비하였다.
참고문헌
이동연, 2003,『강화도 미래신화의 원형』, 푸른세상
박은우 2006, 『강화의 세월』, 학연문화사
역사스페셜 98화 , 2001년 1월 13일 방송
http://www.yushin.or.kr/@history/dvd-kbshistory/kbs098.htm
http://blog.daum.net/pjb1223/10667131
http://www.jeondeungsa.org/sub1/sub1.php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