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며
1. 제1차 금고문논쟁 : 宣帝 연간 石渠閣 논의와 今古文의 校勘
2. 제2차 금고문논쟁 : 哀帝 연간 劉歆과 太常博士의 논쟁
3. 제3차 금고문논쟁 : 光武帝 연간 陳元과 范升의 논쟁
구전되고 문헌텍스트로 정착하게 되었다.
古文은 武帝의 治世에 魯나라 共王이 宮室을 확장하며 孔子의 古宅을 건드리다가 그 담장 안에서 얻게 되었는데 모두 古文으로 되어있었다고 한다.『漢書』권30「藝文志」“武帝末, 魯共王壞孔子宅, 欲以廣其宮, 而得古文尚書及禮記、論語、孝經凡數十篇, 皆古字也.”
이후에도 이러한 우연이 아닌 인위적인 명령을 통하여 遺書 및 佚書를 찾아서 上同 “至成帝時, 以書頗散亡, 使謁者陳農求遺書於天下.”
얻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두 가지 방법으로 다시 등장하게 된 유가 경전은 전자와 후자의 차이가 上述하였듯이 현격하였는데『漢書』「藝文志」에서는 “문자가 서로 다른 것이 7백 남짓하고 빠진 글자가 수십 자나 되었다.” 文字異者七百有餘, 脫字數十.
라고 말하는 기사에서 그 실상을 잘 알 수 있다. 통치의 근간으로 작용되어야 할 학술 및 사상의 근거가 되는 經傳『隋書』권30「經籍志」1 “夫經籍也者, 機神之妙旨, 聖哲之能事, 所以經天地, 緯陰陽, 正紀綱, 弘道德, 顯仁足以利物, 藏用足以獨善.”
이 판본에 따라 다르다는 문제가 있다는 것은 발생해서는 안 될 일로서 이러한 사안이 조속히 처리되지 않는다면 前述한 儒學의 목적이 상실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劉向 등의 諸臣에게 今古文의 상호 교정 및 교감을 명하고『漢書』권30「藝文志」“詔光祿大夫劉向校經傳諸子詩賦, 步兵校尉任宏校兵書, 太史令尹咸校數術, 侍醫李柱國校方技. (中略) 會向卒, 哀帝復使向子侍中奉車都尉歆卒父業.”
아울러 宣帝 甘露 연간에 五經의 같고다름[同異]에 대한 비교 및 논의를 石渠閣에서 개최 上同 “甘露中與五經諸儒雜論同異於石渠閣.”
하게 되었던 것으로 이 논의는 초기 經學史에 있어서 중요한 쟁점이 될 今古文論爭의 발단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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