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일본인 위주의 공업전문학교
Ⅲ. 조선인 하급 수공인력의 양성
Ⅳ. 기술관리의 차별 선발
Ⅴ. 선교사들의 전문학교 설립
Ⅵ. 맺음말
1. 경성공업전문학교
병합 다음 해인 1911년 9월, 조선총독부는 제1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였는데 그 조항의 하나로 전문학교에 관한 규정을 포함시켰다. 즉 고등보통학교 졸업자 및 이와 동등한 학력자를 입학시켜 3년 내지 4년의 수업연한으로 고등 학술 및 기예를 가르칠 전문학교를 설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행에 필요한 구체적인 세부규칙은 마련되지 않으며, 조선인들이 고등교육을 요구할 경우 전문학교 설립을 통해 그 요구를 수용할 생각이었다. 한편으론 조선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육은 물론 해외로의 유학에 대해서는 철저히 억제하겠다는 의도의 표현이었다.
공업전문학교는 1915년 설립될 예정으로 계획되었다. 먼저 그 해 3월에 '전문학교규칙'이 공포되어 전문학교 설치 및 운영에 다른 제반 지침이 세워졌다. 처음에는 총독부가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조선총독부공업전습소에 특별과 형태로 만들었다. 海日申報 (1915.3.30, 4.7)기사 중에는 "공업전습소에서는[……] 특별과를 설립하였으니 장래에 적당한 시기에서 그 조직을 전문학교로 변경할 前?이다"라는 내용이 실려있다.(재인용)
이 과정은 고등보통학교 졸업 및 이와 동등한 학력의 조선인을 입학시켜 수업연한 3년으로 운영되는 염직과, 요업과, 응용화학과로 구성된 전문학교 수준의 학제였다. 다음해에 가서야 예산이 확보되어 다른 전문학교들과 더불어 정식 공업전문학교가 공업전습소 특별과를 개편 확대하여 설립되었다. 학교 명칭은 관립 경성공업전문학교로서 일본의 고등공업학교와는 구분되어 불렸다. 그러나 전문학교라 할지라도 일제는 조선에 세운 경성공전을 일본의 그것과 똑같은 수준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는 조선에 처음으로 설립되는 비교적 수준 높은 교육기관으로서 일제가 조선인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으로 보일 수 있고, 특히 가장 불만을 느끼고 있던 식자층의 반감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아울러 일제의 팽창을 탐탁치 않게 여길 다른 국가들에게 일제의 조선지배가 억압적이지 않고 선정을 펼치는 것처럼 보여 비난의 빌미를 없앨 필요도 있었다. 총독부는 해마다 영문보고서 "Annual Report on Reforms and Progress in Chosen"을 만들어 자신의 치적을 외국에 소개하였으며 이후 경성제국대학 설립 시에도 다른 국가들에 비칠 자신의 이미지를 크게 고려하였다.
조선의 고등보통학교로는 경성고보와 평양고보가 있었는데 1915년의 경쟁률이 354명 모집에 1,549명이 지원하여 평균 4.4 대 1에 달하였고, 졸업생은 1913년 43명, 1914년 90명, 1915년 93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들 졸업생을 수용할 전문학교 수준의 교육기관은 조선에는 경성전수학교뿐으로 입학생은 한 해에 50명 내외였다.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하는 고보 졸업생이 1914년부터는 절반 가까이 되었고, 그 수가 매년 누적되면서 결과적으로 가장 고학력의 조선인이 사회 불만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이 같은 문제를 자신의 힘으로 직접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그 활동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났다. 그 중 하나는 조선에 고등교육기관을 스스로 또는 외국인의 힘을 빌려 세우려고 한 것이었다. 조선인 측에서는 국채보상운동으로 모금된 수백만 원의 돈을 1910년 병합이 되자 민립대학 설립기금으로 전환하였다. 이들은 민립대학 설립 기성회를 조직하고 대학 설립인가를 총독부에 요구하였으나 허가를 받지는 못하였다. 일제는 조선인의 대학 설립 움직임을 철저히 차단하였고, 선교사의 경우에 한해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외국 정부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한 유화책의 일환으로 제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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