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 (1914 - 1918)의 종결과 함께 식민지 민족의 해방운동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었다. 제국주의끼리 전쟁을 하는 동안 상대적으로 식민지 해방운동이 성장하였고, 게다가 전쟁에 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투르크제국, 독일제국의 식민지를 해방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라는 용어의 등장은 이 분위기를 가속화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본에 유학 중인 한국학생 200여명이 일본 제국주의 심장인 동경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2.8 독립선언) 이 소식은 선언서와 함께 국내로 들어와 당시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던 종교지도자와 학생들에게 자극을 주었고, 민족종교인 동학의 뒤를 이은 천도교의 지도자인 손병희 선생과 기독교계의 지도자 이승훈 선생이 연합하여 독립선언을 하기로 합의하였고, 여기에 불교계의 한용운 선생과 학생이 대거 동참함으로써 민족 연합이 형성되었다. 곧이어 민족대표를 결정하고 3․1일 파고다 공원에서 비폭력 만세시위로 독립을 선언하기로 하였으니 이것이 3․1 운동의 발단이 되었다. 민족대표들은 총독부에 자수하여 운동을 지도하지는 못했고, 후에 변절자가 많이 나왔지만, 종파를 초월하여 민족 앞에서 단결하여 이 거대한 민족운동의 단초를 열었다는 것은 높이 평가할 일이다.
2.대도시 중심( 3월 중순까지 )
기미년 오후 2시 30분, 파고다 공원에 운집한 학생 시민 5천여명에 둘러 싸여 정재용학생이 팔각정에 올라 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10년만에 등장한 태극기를 들고 "조선 독립 만세" 를 외쳤다. 만세시위는 서울시내를 가득 메웠다. 서울 시민 뿐만 아니라 고종의 인산을 보기위해 상경한 사람들도 동참하여 서울은 인산 인해를 이루었고 이날 만도 4-50만이 참가하였다. 같은 날 평양에서도 "일본놈, 일본군대 물러가라"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수천명이 만세시위 벌였다. 뿐만 아니라 전국의 대도시는 같은 양상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종교지도자와 청년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식민지의 현실을 인식하고 애국심과 기동성을 가지고 시위가 전국으로 퍼지는데 큰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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