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2. 농업 기술의 발달과 변화
3. 상업의 변화
4. 신분제의 변화
5. 결론
- 이앙법의 보급 : 이앙법은 논에다 직접 볍씨를 뿌리는 직파법과는 달리 모판에서 모를 길렀다가 논에 옮겨 심는 것이다. 가뭄에 취약한 약점이 있어 법으로 금지하기도 했으나 수리 시설이 보완되고, 수확량이 많은 반면 제초 횟수가 적고 수월하여 노동력이 훨씬 절감되며 모판에서 모가 자라는 동안 농토를 그만큼 더 이용할 수 있기에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 견종법의 보급 : 견종법은 이랑에다 작물을 심는 농종법과는 달리 고랑에 심는 것으로 바람을 막아 종자를 보호할 수 있는 등 밭농사에 특히 효과가 커서 보리와 밀농사에 유용하였으며 이앙법과 마찬가지로 수확의 증대와 노동력의 절감을 가져왔다.
- 시비법의 개발 : 시비법은 비료의 양과 질을 높인 것으로, 인분의 이용 및 비료의 종류도 다양해져 풀을 베어 거름을 만드는가 하면, 가축의 분뇨를 이용하고 벼나 보리의 짚을 태워서 토양의 유기질을 늘리고 질소 성분을 증가시켰다.
그들은 수일 후에 모두 버드나무와 가죽나무 말목을 부탁한 개수대로 해와서 수만여개의 말목이 모였다. 동흘은 마소를 내어 말목을 전부 싣고 이공과 함께 건지산 기슭의 시장(柴場)으로 갔다. 시장은 동흘의 땅이었다. 동흘은 이공과 더불어 하인들과 함께 풀을 말끔히 제거한 다음에 총총히 말목을 자 남짓의 깊이로 꽂았다. “명춘에는 여기 서숙을 파종합시다.” 명년 봄 해동한 다음에 동흘은 이른 서숙씨 몇 말을 구해 가지고 이공과 함께 건지산 기슭으로 갔다. 말목을 뽑아내고 구멍마다 서숙씨 7,8낱을 집어넣고 새 흙을 그 구멍에 넣어 덮었다. 여름에 서숙 싹이 구멍을 뚫고 나오는데 아주 탐스러웠다. 그 중 연약해 보이는 것은 솎아 버리고 한 구멍에 3,4 그루만 남겼다. 풀이 나면 뽑아 주고 잘 가꾸었더니 결실한 모가지가 방망이만큼 컸다. 타작을 해서 소출이 50여 섬을 넘었다. 이공은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졸지에 부자가 된 셈이었다. 버드나무나 가죽나무의 진은 본래 비옥한 것이며, 한 자 깊이의 땅 속은 흙의 기운이 온전하고 새롭다. 겨울을 지나면서 눈 빗물이 구멍 속에 스며들어 나무의 진과 융합되어서 충분히 적셔지면 곡식의 싹이 무성하게 자랄 수 있다. - 이조한문 단편집 中 제4부 20. 全州 政丞. 「청구야담」권6에서 뽑은내용.
위의 내용은 산지를 개간해서 조를 많이 수확하는 대목인데 새로운 농법의 시도로 볼 수 있다. 버드나무와 가죽나무 말목의 진이 좋은 비료가 되어 주었고 그래서 작물의 수확이 더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 상품작물의 재배 : 주로 서울 부근과 각 지방의 대도시 주변에서 재배되었고 파, 마늘, 오이, 담배, 인삼, 고구마 등의 상품작물들이 재배되었다.
- 농사법의 발달에 따른 사회 변화
공은 남의 손을 빌려 땅을 갈면 비용이 들 뿐 아니라 자기가 힘써 하느니만 같지 못하리라 싶어, 소에 쟁기질을 재운 것이다. 논이고 밭이고 갈기를 열 번이나 하여 깊숙이 흙을 일으키니 다른 농부에 비할 바 아니었다. 밭에는 담배모를 옮겨심기 위해서 거름을 두껍게 깔고서 이랑 위에 무수히 구멍을 뚫고 비오기를 기다렸다. 한편 가뭄이 들어 담배 모종이 시들까 염려하여 이른봄에 길게 가자를 매고 그 아래 담배씨를 파종하여 자주 물을 주었다. 그해 마침 크게 가물어 도처에 담배모종이 전부 말라죽었으나, 공의 담배 모판은 유독 무성했던 것이다. 비가 오자 즉시 옮겨 심었더니, 오래지 않아 담배 잎사귀는 파초처럼 너푼너푼 땅을 덮었다. 담배가 약이 차기도 전에 강상의 연초 상인이 찾아와서 담배 밭이 통째로 200꿰미에 흥정이 되었다. 담배장수는 잎사귀를 따서 모래사장에 말려가지고 가더니 후에 다시 100냥을 가직 와서 그 순도 사갔다. 10두락 소출의 곡식도 역시 100석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재산이 매달 불어나고 매해 늘어가서 그 성장을 이루 척도 할 수 없었다. 5,6년 미만에 노적이 충만하고 논밭이 연달아서 10리 안통의 농민들이 공의 집에 의지하지 않는 자 없이 된 것이다. 사방의 소작인들이 주찬과 어육으로 인정을 쓰니 밥상에 고기 반찬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여전히 귀리죽 반 사발은 더하고 덜함이 없었다. - 이조한문단편집 上 제1부 3. 廣作. 「동패낙송」권 상.
․ 인정 : 뇌물을 바치거나 선사하는 것.
이 이야기 속에서는 상품작물인 담뱃재배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제목이 말해 주는 광작이다. 광작은 18세기 이래로 노동 생산성의 향상과 더불어 종래 안일한 지주들의 생활 방식과는 달리, 넓은 토지를 직접 경영하는 역농가들의 증산 운동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을 토대로 해서 농촌에 많은 부자가 새로이 등장하기도 했다. 위 이야기의 주인공 역시 피나는 노력으로 농사의 광작을 벌이는 데 힘써 부자가 된 실례의 하나로 보인다. 그리고 소작인들이 지주인 허 공에게 인정을 쓰는 모습을 통해 광작으로 인해 소작농들은 농사지을 땅을 구하기가 어려워 진 당시 사회의 단면도 볼 수 있다.
3. 상업의 변화
조선은 초기 고려시대에 비해 상업 활동의 통제가 심했었는데 그 이유는 조선이 농본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란 이후 조세의 금납화로 인한 사상의 성장, 장시의 발달 등으로 상업이 전기에 비해 활발해진다.
서울의 선대의 유업으로 거금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는 돈을 남에게 빌려주고 그 이자를 기루었을 뿐, 그 자신은 한 번도 상업이나 교역에 직접 종사한 적이 없었다. 이 점을 비꼬는 사람이 있었다. “사내 대장부로서 10만 전을 차고 멀리 도회지로 돌아다니며 큰 이득을 취하지 못하다니.” 그가 묻기를 “도회지라니 어디 말인가?” “송도 ․ 평양 ․ 의주 ․ 동래 ․ 원산포 ․ 함흥 ․ 전주 ․ 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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